▶ 한국일보 어스틴 지국장 서지원
▶ 꼭 보고싶었던 은사를 생각하며
수 년 전부터 ‘살아 생전에 꼭 한 번은 뵈리라.’ 마음 먹고 금년이 아니면 내년에라도 찾아 뵙겠다고 다짐하고 다짐하다 작년에 겨우 전화 한 통화만 하였다. 올해는 꼭 뵙고 가겠다고 작정하고서 한국에 잠시 나간 김에 11월 13일, 마산 행 버스를 탔다. 그리고 버스에서 전화를 하였더니 이게 웬일인가? 건강하시던 선생님께서 10월 5일, 이미 저 먼 곳으로 떠나셨단다.
보고 싶은 얼굴들은 기다려 주질 않는다. 잠깐 눈 앞이 캄캄했다. 어린 시절 6.25 전쟁 직후 진주사범부속국민학교 5,6학년 2년 동안 담임 선생님이셨다. 훤칠한 키에 빼어난 미남이셨던 공창섭 선생님. 각별히 나를 아끼시고 항상 큰 그릇이 되라고 격려하고 지도해주셨던 잊지 못할 추억 속 은사님.
1953년 초등학교 6학년 시절, 밤 9시가 넘도록 6학년 1반 전체가 벌 받고 있을 때가 영화 속의 장면처럼 스쳐 지나간다. 체육시간이라 모두 운동장에 있었는데 누군가가 교실에 들어와서 가방을 뒤져 돈을 훔쳐 간 사건이 일어났다. 선생님께서는 매질은 하시지 않으셨다. 다만 모두 가만히 눈을 감고 반성하고 범인만 조용히 손을 들라고 하셨다. 좋은 말씀으로 계속 훈계만 하시면서 범인이 자수할 때까지 아무도 집에 돌려보내주질 않으셨다. 1시간, 2시간 밤이 깊어만 갔지만 아무도 나타나질 않았다. 난생 처음, 4시간 이상 눈을 감고 있으면서 많은 것들을 생각하고 뒤돌아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그 때 생각하고 느낀 점을, 직접 실행하지 못한 용기 없는 행동을 지금도 가끔씩 후회할 때가 있다. 반장인 내가 용감하게 반 전체를 위해서 조용히 손 들고 나섰더라면 모두들 일찍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 텐데. 그런 생각만 뇌리에 맴돌았을 뿐 막상 손 들고 일어설 용기를 갖지 못한 내가 두고두고 부끄러웠다. 그리고 선생님께도 죄송한 마음을 평생 간직하게 되었다.
‘선생님’ 하면 자동적으로 공창섭 선생님의 얼굴이 번쩍 떠올랐는데. 아쉽구나 많이도 아쉽구나. 선생님께서 바라시던 내가 되질 못해서 그 앞에 떳떳이 나타나지 못하고 뜸만 들이다가 이제야 찾아왔는데. ‘더 늦기 전에 뵈어야지’ 하는 나의 미련한 마음을 져버리고 날려버리셨네. 나보다 12살이 많으시니 향년 78세. 만나면 하고픈 말들을 수십 년 간 고이 간직해왔는데. 이젠 그 마음과 말들을 그대로 접고 접어 보관했다가 훗날 그곳에서 만나면 모두 펼쳐내야겠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무심함도 무례함도 용서해 주시고 옛날처럼 온화하고 맑고 밝은 얼굴만 기억나게 해주십시오. 훌륭한 교장선생님으로 교육자의 마지막 길을 가셨을 줄 믿습니다.
미련한 제자가 선생님 살아 생전에 인사 한번 못 드리고 먼 길 떠나실 때까지 찾아 뵙지 못한 것, 두고두고 후회하면서 가슴 아파하게 되었습니다. 선생님께선 인자하신 천성을 타고 나셨으니 다 잊으시고 용서해 주시겠지만 이 미련한 제자는 할 말이 없습니다.
이제부터는 생각나는 형님들이나 친척 어르신들 계시면 뒤로 미루지 말고 생각났을 때 바로 찾아 뵙고 인사 드려야겠구나 - 하는 다짐을 해 봅니다. 세월이 많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 세대가 저물고 다음 세대가 이미 중천까지 왔으니까 급할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선생님 고이고이 잠드소서. 내년에는 산소에도 꼭 찾아 뵙고 한아름 흰 국화와 남겨둔 눈물도 함께 드리우리다.’
2007년 11월 22일
제자 서지원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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