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과 타향의 차이
지난달 오랜만에 ‘고향’에 다녀왔다. 시택공항을 떠날 때 겨울비가 주룩주룩 내렸는데 불과 두 시간 반 후 비행기에서 내리니 한 여름처럼 땡볕이 작열했다. ‘타향살이’ 10년이 너무 길었는지, 그 전에 20여년이나 살았던 LA가 딴 나라처럼 느껴졌다.
날씨만이 아니다. 전보다 더 커지고 더 복잡해진 LA 한인타운도 생소했다. 예전에 못 본 건물과 업소들이 많아 생겨났다. 모처럼 옛 동료들과 다방에서 회동했는데, 그 중 사업가로 변신한 한 친구가 스타벅스 커피를 홀짝이며 “시애틀 촌사람들은 요즘 뭐 해먹고 사나?”고 물었다. 부아가 치밀었지만 LA와 시애틀의 격차를 부인할 수는 없었다.
전국 어느 곳에서든지 한국일보 현지판의 광고 면, 특히 안내광고(Classified Section)를 참조하면 그 지역의 한인 비즈니스 현황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필자도 그날 저녁 총 148페이지(주간지 포함)나 되는 본보 LA판을 뒤적였다. 안내광고 판이 16면이나 됐다. 모두 합쳐서 4 페이지 남짓한 본보 시애틀 판의 안내광고와는 비교가 안 됐다.
LA 한인사회엔 시애틀에선 볼 수 없는 업종이 많다. 라스베가스 결혼(이혼)수속, 재혼 중매, 파출(가정)부 알선, 선교 사역지 물색, 여자 택시기사 모집, 애완견 털 관리사 구함, 룸메이트 구함, 개인장지(묘지) 판매, 욕조타일 재생, 재산세 재조정 신청 따위이다.
시애틀과 LA의 한인 비즈니스 격차는 두 지역의 업소 전화부(Directory)를 비교하면 더 여실하게 드러난다. 본보 LA본사가 발행한 업소 전화부는 크기부터 우람하다. 업소, 단체, 기관 등의 리스팅만 1080 페이지이고 권말부록인 ‘미국생활 가이드’가 70페이지로 총 1150 페이지이다. 본보의 시애틀 판 업소 전화부를 4권 겹쳐놓은 것보다 더 두텁다.
우선, 식당항목을 보면 한식이 476개, 중국식이 75개, 일식이 170개, 경양식(카페 포함)이 204개 등 모두 925개 업소가 등재돼 있다. 시애틀 일원의 한인식당은 일부 테리야끼와 월남국수집까지 합쳐 고작 157개이다. LA의 배달식당(케이터링)은 40개(시애틀엔 별도 항목으로 없음), 수퍼마켓 등 대형식품점과 식품도매업은 156개(시애틀 29개)이다.
한인인구 추산의 객관적 근거가 되는 교회(교회단체 포함)가 513개(시애틀 162개), 병원이 1,234개(전문병원 652개, 치과 506개 포함) 등재돼 있다. 시애틀의 한인병원은 치과를 포함해 49개뿐이다. 변호사 사무실이 287개(시애틀 54개), 보험이 427개(시애틀 52개), 부동산 중개업이 1,010개(시애틀은 에스크로 및 감정까지 합쳐서 422개)이다.
시애틀 지역(워싱턴주) 한인인구는 통상 15만, LA 지역(남가주)은 150만으로 친다. LA 한인타운 도로에선 한인들끼리 자동차 충돌사고를 내기 일쑤고, 전화가 잘 못 걸려도 “여보세요”라는 대답을 듣는 게 다반사다. 이제 무비자시대를 맞아 한국인 유동인구가 크게 늘어나고 있으므로 LA는 ‘서울특별시 나성구’라는 별명이 썩 잘 어울리게 됐다.
그러나 크다고 다 좋은가? LA 한인사회의 규모가 시애틀의 10배라고 해서 모든 면에서 10배씩 좋은가? 비즈니스 판도가 10배 클지는 몰라도 생활의 질은 10배 나쁠 수 있다.
그날 스타벅스 커피 점에서 만난 옛 동료들은 모두 노인이 돼 있었다. 시애틀을 ‘촌구석’으로 폄하한 친구는 완전히 대머리였다. 그가 필자에게 “그동안 전혀 안 늙었네!”라며 비결을 묻자 필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아니, 우리 나이에 이렇게 공기 탁하고 시끄럽고 복작거리는 동네서 어떻게 사나? 풍광 좋은 시애틀에 와서 함께 산에나 다니자”며 목에 힘을 줬다.
‘타향도 정이 들면 고향’이라는 유행가 가사가 있었다. ‘타향도 삶의 질만 좋으면 고향’이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윤여춘(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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