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루지와 에벤에셀
‘곳간에서 인심난다’는 속담이 있다. 창고에 쌀가마니가 가득 쌓여야 남들에게 베푼다는 뜻이다. ‘의식족 즉 지영욕(衣食足 則 知榮辱)’이라는 고사성어도 그와 일맥상통한다. 기본적 생활이 안정되면 영욕을 구별해서 남에게 예절을 베풀게 된다는 얘기다.
동양적 사고방식으로는 당연한 이런 말이 미국에선 안 통한다. 미국인들은 풍족할 때나 어려울 때나 한결같이 자선을 베푼다. 오히려 어려울 때 더 열심히 돕는다.
보잉사 직원들은 지난 가을 기술자노조의 장기파업으로 봉급을 제대로 못 받았는데도 오히려 예년보다 3배나 많은 성금을 모아 푸드 뱅크에 기부했다. 다른 많은 기업체도 연말 직원파티를 취소하거나 규모를 줄여 올해 유난히 더 많아진 불우이웃들을 돕고 있다.
미국인들은 10명 중 7명(전체인구의 69~72%)이 매년 기부금을 낸다. 이들의 성금총액은 지난 40년간 해마다 늘어났다(세법이 개정된 1987년만 예외). 증권파동이 일어났던 2002년에도 전체인구의 70%가 평균 2,000 달러씩 기부한 것으로 집계됐다. 지난 10월말 전국적으로 실시된 여론조사에서도 응답자 10명 중 7명이 연말쇼핑 비용을 줄일 계획이라고 말했고, 절반가량은 선물구입을 자제하고 대신 자선기관에 기부하겠다고 밝혔다.
미국 최대 모금기관인 유나이티드 웨이, 페더럴웨이에 본부가 있는 세계적 자선단체 월드비전, 적십자사, 심장협회 등 주요 모금기관들은 현재 미국을 짓누르고 있는 최악의 경기상황과 관계없이 올해 모금목표를 무난히 달성할 수 있을 것으로 낙관한다. 민생고를 겪는 이웃이 많을 때일수록 민초들의 십시일반 기부가 늘어나는 전통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민초들 외에 큰손도 많다. TV 토크쇼의 여황제로 불리는 오프라 윈프리는 지난해 총 5,020만 달러를 기부해 ‘가장 자비로운 명사’의 영예를 얻었다. 60년대 ‘꿀맛’이라는 히트곡으로 뜬 트럼펫연주자 허브 앨퍼트가 1,300만 달러로 2위, 뮤지컬 스타 바브라 스트라이샌드가 1,100만 달러로 3위, 사업가 배우 폴 뉴먼이 1,000만 달러로 4위에 올랐다.
그러나 이들 명사의 기부금은 규모가 큰 만큼 용도도 거창하다. 윈프리는 세계 여성 및 아동 복지증진, 앨퍼트는 자기 이름을 딴 UCLA 음대 등 음악교육 지원, 스트라이샌드는 인권향상 및 에이즈 연구지원, 뉴먼은 모교인 케년 대학의 장학금 등으로 각각 지정한다.
불우이웃 돕기 성금은 이런 큰손들을 기대할 수 없다. 취지에 어울리지도 않는다. 액수가 적어야 오히려 정성이 드러난다. 한 독자부부는 “금액이 적어 부끄럽지만 용기를 내서 보낸다”는 쪽지와 함께 30 달러를 기탁했다. 십시일반의 본보기여서 크게 감격했다.
올해 불우이웃 돕기 캠페인을 시작할 때 필자는 매우 불안했다. ‘곳간에서 인심난다’는 속담을 신봉해온 탓이다. 한인들도 미국인들처럼 어려울 때 더 너그러워진다는 사실을 전에는 몰랐었다. 캠페인 시작 3주 만에 1만달러 이상 걷혔다. 어려운 이웃을 돕는 것이 영(榮)이요, 혼자 잘먹고 잘사는 것이 욕(辱)이라는 인식이 한인사회에 정착해가는 듯하다.
해마다 이맘때면 자린고비 스크루지 영화가 TV에 등장한다.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롤’이 원작인데, 스크루지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에비니저’(Ebenezer, 한글성경엔 ‘에벤에셀’)가 그의 이름이다. ‘하나님이 도우신다’는 뜻이다. 그래선지, 욕심쟁이 스크루지가 크리스마스이브에 악몽을 꾼 후 ‘큰손’으로 돌변한다.
올 겨울 한인사회에 에벤에셀의 스크루지가 어느 해보다 많아졌으면 좋겠다. 춥고, 배고프고, 아프고, 외롭지만 하소연할 곳이 없어 한숨만 쉬는 동포가 크게 늘었기 때문이다.
윤여춘(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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