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미 당시 의사가 목표...생계 어려워 한때 포기
생활비 벌어가며 공부
어떤 역경 속에서도 꿈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한인들이 있다. 밑바닥에서 시작해 전문직에 오른 한인, 조그만 구멍가게에서 중견업체로 성장시킨 한인 등등. 극심한 경기침체로 한인 사회 전체가 시름시름 앓고 있는 요즘, 어떤 역경 속에서도 자신의 꿈을 버리지 않고 이를 지켜낸 한인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통해 한인사회 새 희망을 찾아본다.
지난해 5월 뉴욕의과대학 치과의사 시험에 합격, 현재 브롱스 자코비 메디컬 센터 치과의사로 일하고 있는 최성민(사진·30)씨. 1996년 고등학교 2학년 때 헐벗고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의사가 되는 청운의 꿈을 갖고 미국에 혈혈 단신 건너온 그는 꿈을 지켜내기 위해 누구보다 험준한 인생의 파도를 헤쳐 왔다.
그가 도미한 이듬해 목사였던 아버지 최명호씨와 어머니 양순애씨 역시 아들을 돌봐주기 위해 미국에 왔지만 개척교회 목사 가족들에게 준비되지 않은 이민생활은 만만치 않았다. 아버지 최씨는 낮에는 목회를, 밤에는 채소가게에서 일했고 가사 일만 해 왔던 양씨 역시 재봉일, 식당일 등을 하며 가족의 생계를 꾸려갔다. 그 역시 자신의 교육 때문에 이민 와 고생하고 있는 부모를 위해 이를 악물고 공부해 1998년 버룩칼리지에 입학, 회계학을 선택하게 된다. 그는 조금이나마 빨리 졸업해 가족의 생계를 돕고 싶었기 때문에 의대진학의 꿈을 접어야 했다.
학비를 벌기 위해 낮에는 공부하고 밤에는 세탁소, 식료품 가게, 식당 등에서 닥치는 대로 일했고 버룩 칼리지 3학년 때 유명 금융회사의 인턴으로 취직, 전도유망한 금융인의 길을 걷는 듯했다. 그러던 어느 늦은 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어두운 창밖을 바라보며 그는 앙드레 말로
의 ‘오랫동안 꿈을 그리는 사람은, 마침내 그 꿈을 닮아간다’라는 말을 문득 떠올리게 됐다고. 그 순간 자신의 가슴 속에서 여전히 어릴 적 의사의 꿈이 꿈틀대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남들은 취직준비에 여념이 없는 대학 3학년 때인 2002년 의대진학 준비를 시작했다.
고생하는 부모님을 생각하면 대학졸업 후 안정된 직장을 갖는 것이 자식 된 도리라고 생각하면서도 의대진학 외에는 다른 것은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주말에도 매일 오전 6시30분 일어나 공부하다 밤이면 학비와 생활비 마련을 위해 일했고 고단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온 후에도 공부하느라 새벽 3시까지 잠자리에 들지 못할 때가 많았다.하루 4시간도 안 되는 새우잠을 자면서도 오로지 의대 진학이란 꿈을 향해 나아간다는 생각에 악바리처럼 공부했다.
2년의 세월이 흘러 2004년 그는 그토록 바라던 뉴욕대학(NYU) 치과대학에 입학했고 2008년 5월 의사시험에도 합격해 치과의사가 됐다.
모든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 그는 이제 어릴 적 꿈인 의사가 되어 어떤 선교로서 사람들을 도울 수 있을지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김현근의 수기 ‘가난하다고 꿈조차 가난할 수 없다’는 책을 가장 좋아한다는 그는 내가 가진 작은 재능으로 소외된 이웃들과 나누기 위해 앞으로 의료선교에도 매진할 것”이라며 “이제까지의 고생으로 주름진 부모님의 얼굴에 웃음꽃을 피게 해 줄 수 있어 너무 기쁘다고 전했다.
<구재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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