헛슨 강의 미역
미국인들에겐 우유가 ‘미역국’이다. 맥도널드에서 햄버거를 주문한 뒤 점원이 “음료는 뭘 드릴까요?”라고 물을 때 “밀크(우유)”라고 대답하면 십중팔구 못 알아듣는다. “밀, 크, 밀, 크”라고 또박또박 말해도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답답해서 손가락으로 ‘Milk’라고 써 보이면 그제야 “오! ‘미역’이란 말이군!”하며 우유를 내준다는 우스개다.
‘미루꾸’는 필자가 어렸을 때 생일에나 얻어먹은 고급 캔디였다. 요즘 아이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밀크캐러멜’을 그렇게 불렀다. 줄임말의 선수인 일본인들이 ‘캐러멜’은 떼버리고 밀크를 ‘미루꾸’로 표기한 것을 그대로 차용한 ‘중고품(second-hand)’ 영어이다. 미루꾸에 비하면 밀크는 거의 완벽한 발음인데도 미국인들이 못 알아듣는다.
그렇다고 우리가 밀크를 미국인 발음대로 ‘미역’으로 표기할 수는 없다. 그런 식이라면 맥도널드는 ‘맥다노’로, 워터(water)는 ‘워러’로, 젠틀맨은 ‘제늘맨’으로 표기해야 맞다. 하버드는 ‘하알버드,’ 어포인트먼트(appointment)는 ‘포인먼’으로 써야 더 영어답다.
지난주 에드먼즈의 올드타이머인 ‘김선생’이 전화를 걸어왔다. 한글보다 영어가 편한데도 본보를 수십년째 구독하고 있는 그분은 공무원으로 은퇴한 후 영어통역 자원봉사나 ESL 강의에 열성을 내며 노년을 바쁘게 보낸다. 아들이 주류사회 대 신문사의 중견기자이다. 그래선지 본보를 읽다가 틀렸거나 어색하게 표기된 영어를 찾아내 지적해준다.
지난주 전화도 그런 내용이었다. 뉴욕에서 새떼와 부딪친 여객기가 비상착륙한 Hudson강은 ‘허드슨’이 아니라 ‘헛슨’으로 써야 옳다고 꼬집었다. ‘허-드-슨’이라고 발음하면 미국인은 아무도 알아듣지 못한다고 했다. “지난번 통화 때 ‘시애틀’이 아니라 ‘씨애틀’이 맞다고 일러줬는데…(여전히 시애틀로 쓴다)”며 필자를 은근히 나무라기도 했다.
김선생은 그래도 온건한 편이다. 작년 가을 머킬티오에서 우연히 만난 애독자 한분은 한국 문교부와 신문을 싸잡아 비판했다. 신문이 왜 ‘홰밀리(family)’를 ‘패밀리’로, ‘화이어(fire)’를 ‘파이어’로 쓰는지 도대체 알 수 없다며 “그렇게 발음하는 미국사람을 봤느냐?”고 몰아세웠다. 그분은 “영어발음을 그대로 한글로 쓰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문교부가 괜히 외래어 표기법이라는 걸 만들어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든다”고 주장했다.
미국에 오래 산 사람일수록 혼란이 심한 모양이다. 이들에겐 ‘Federeal Way’는 ‘훼드럴웨이’가 아니라 ‘페더럴웨이’로 써야 옳다는 필자의 고언이 마이동풍이다. 신문은 영어를 한글로 표기할 때 일정한 기준을 따르게 마련이다. 안 그러면 통일을 기할 수 없다. 영어를 발음대로 표기하라지만 미국인들의 발음자체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미국인들은 ‘씨애틀’뿐만 아니라 ‘S’와 ‘C’뒤에 모음이 오는 단어는 모두 쌍시옷(ㅆ)으로 발음한다. ‘Sing’은 ‘싱’이 아닌 ‘씽,’ ‘Sand’는 ‘쌘드,’ ‘Sound’는 ‘싸운드,’ ‘Cell-phone’은 ‘쎌폰,’ ‘Senior Center’는 ‘씨니어쎈터’로 읽는다. 그러나 이들 단어의 발음부호는 ‘ss’가 아니라 ‘s’이다. ‘Sing’으로 써놓고 ‘Ssing’으로 읽는 셈이다. 한국 신문은 이들 단어의 발음부호를 존중해 시애틀, 싱, 샌드, 사운드, 셀폰, 시니어센터로 각각 표기한다.
영어의 한글표기는 어차피 미국인이 아닌 한국인을 위한 것이다. 그래서 기준이 필요하다. 원음에 가까울수록 좋지만 완벽하게 옮겨 쓸 필요는 없고, 그럴 수도 없다. ‘시애틀’이 ‘Seattle,’ ‘허드슨’이 ‘Hudson’임을 이해하면 그것으로 좋다. ‘맥도널드’를 읽고 ‘맥다노’로 발음하면 더욱 좋다. 일본인들은 ‘고뿌’라고 써놓고 ‘컵(cup)’으로 발음한다. 그 정도의 혼란이나 고충은 외국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져야할 십자가인 것 같다.
윤여춘(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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