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의 등불
지난 연말 한 친지로부터 사업체를 달라스로 옮기려고 집을 내놨다는 말을 들었다. 지난 일요일엔 마이크로소프트 직원이었던 동료교인이 뉴저지에 새 직장을 잡아 곧 이사한다고 말했다. 보잉 직원이었던 다른 교인은 오래 전에 샌디에고로 떠났다.
근래 적지 않은 한인들이 시애틀을 등지지만 전체 전출인구에 비하면 ‘새발의 피’다. 워싱턴뮤추얼(WaMu), 보잉, 스타벅스, 마이크로소프트 등 시애틀의 모든 대기업이 천 단위, 만 단위씩 감원하는 바람에 아파트들이 썰렁하고 고속도로도 헐렁하다.
시애틀에 LA 한인들이 몰려온 때가 있었다. LA집을 팔면 시애틀에서 집과 비즈니스를 한꺼번에 매입할 수 있었다. 필자가 10년 전 시애틀로 전근온 뒤 워싱턴주 운전면허증을 신청하러 DMV에 갔을 때 담당직원이 서류를 보고는 “흥! 또 캘리포니아에서 왔군…”하며 혀를 찼었다. 요즘은 반대로 LA로 돌아가고 싶다며 그곳 비즈니스 정보가 게재된 LA판 한국일보나 업소 전화번호부를 구할 수 없냐고 묻는 한인들이 종종 있다.
요즘 ‘탈 시애틀 현상’이 처음은 아니다. 올드타이머 한인들은 70년대 초의 ‘시애틀 엑소더스’를 생생하게 기억한다. 당시 워싱턴주를 혼자 먹여 살렸던 보잉이 6만명이상을 감원하는 바람에 주 실업률이 전국평균보다 두 배 이상 높은 13%까지 치솟았다. I-5 고속도로엔 타주로 옮겨가는 실직자들의 U-홀 트럭 행렬이 꼬리를 이었다고 했다.
1971년 5월22일자 런던 이코노미스트지는 ‘절망의 도시’라는 제목으로 시애틀 상황을 보도했다. 기사를 쓴 특파원은 “현재 미국에서 중고차와 중고TV와 살만한 집을 구입하기에 가장 좋은 곳은 시애틀이다. 주민들이 먹고살고, 집세 내기 바빠서 돈이 될만한 건 모두 내다 팔기 때문에 도시 전체가 거대한 전당포로 변했다”고 호들갑 떨었다.
그보다 한달 앞서 시택공항 부근에 “시애틀을 떠나는 마지막 사람은 전등불을 끌지어다(Will the last person leaving Seattle, turn out the lights)”라고 쓰인 빌보드가 등장했다. 당시 상황을 10 단어로 묘사한 ‘촌철살인’이었다. 그후 디트로이트, 휴스턴, 세인트루이스, 뉴저지, 호주 등에 지명만 바꾼 똑같은 문구의 간판이 속속 세워졌다.
이 빌보드는 시애틀의 아파트건물 전문 중개인이었던 밥 맥도널드와 짐 영그렌의 합작이었다. 퍼시픽 Hwy S와 167가 교차로에 한달 계약으로 세워진 이 빌보드는 고작 보름만에 철거됐다. 문안이 지나치게 비관적이라는 주민들의 비난을 견디지 못한 광고회사가 나머지 15일분 광고료 80달러를 환불해주고 계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해버렸기 때문이다.
빌보드의 두 주인공은 결코 시애틀을 떠나지 않았다. 오히려 외지인들에게 아파트를 팔아 떼돈을 벌었다. 맥도널드(71)는 46세에 은퇴한 후 120여 국가를 여행했고, 영그렌(68)은 샌완군도에 살며 남가주 팜스프링스에 별장을 갖고 있다. 이들은 호시절은 되돌아오게 마련이라며 “진짜 약삭빠른 사람은 요즘 같은 불황일 때 부동산을 산다”고 주장한다.
지난주 필자가 만난 한 금융전문가도 “불경기는 3년이상 지속된 예가 없다”며 모두 참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워싱턴주의 현재 실업률은 7.8%이다. 20여년 만에 최고수준이고 전국평균보다도 약간 높다. 그러나 38년 전 ‘시애틀 엑소더스’ 때 전국평균의 두 배였던 13%에 비하면 별것도 아니다. 시애틀 전체가 전당포로 변하지도 않았다.
어젯밤, 비 내리는 시애틀 다운타운은 여전히 휘황찬란했다. 스페이스 니들 첨탑의 빨간 불빛도 또렷하게 깜빡거렸다. I-5를 따라 북상하는 필자 차 옆에 U-홀 트럭 한대가 달리고 있었다. 시간과 방향을 고려할 때 전입자라고 판단돼 마음이 놓였다.
윤여춘(편집인)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