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과 튤립
지난 70년대까지도 서울 서민들의 넘버원 봄철 행락코스는 창경원 벚꽃놀이였다. 4월 한 달 동안엔 창경원이 낮밤 없이 만원사례였다. 진해의 벚꽃 군항제를 구경 가기엔 서민들의 주머니가 얄팍했다. 여의도 순환도로에 벚꽃이 흐드러진 건 훨씬 후의 일이다.
시애틀엔 서울사람들의 창경원 벚꽃놀이를 ‘야코죽이는’ 상춘 나들이코스가 있다. 한국에선 죽었다 깨나도 볼 수 없는 환상적 풍광이다. 워싱턴주와 미국은 물론 전 세계에서도 규모가 가장 크다. 마운트 버논을 중심으로 펼쳐져 있는 스캐짓 밸리의 튤립꽃밭 얘기다.
마운트 버논은 원래 국부 조지 워싱턴의 버지니아 생가 이름이다. 소년 조지는 마운트 버논 집 뜰에서 어느 봄날 튤립이 아닌 벚나무를 도끼로 자른 후 아버지에게 이실직고한 것으로 전해진다. 일리노이, 메인, 아이오와, 오하이오 등 여러 주에 마운트 버논이라는 도시가 있지만 튤립 꽃으로 전 세계에 이름을 날리는 마운트 버논은 워싱턴주에만 있다.
시애틀에서 북쪽으로 I-5를 따라 60마일도 채 안 되는 곳에 매년 4월 무지개색깔의 별천지가 1,000여 에이커에 걸쳐 펼쳐진다. 연간 100여만명의 관광객이 승용차와 전세버스는 물론 수상비행기까지 타고 몰려온다. 튤립축제가 매년 4월1일부터 한 달간 열리지만 올해는 심한 꽃샘추위로 꽃이 늦게 핀 탓에 4월 하순~5월 초순경에 피크를 이룬단다.
튤립의 원산지는 네덜란드(화란)가 아니다. 원래 중국, 인도, 이란, 북아프리카, 남유럽 등지에 150여종으로 분포돼 있던 야생화였다. 튤립이 언제 화란에 도입됐는지 불분명하지만 1634~37년 화란을 비롯한 북유럽인들 사이에 ‘튤립열풍’이 불어 튤립 구근(알뿌리)이 일종의 화폐로까지 행세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 뒤 튤립재배는 화란인의 전유물이 됐다.
마운트 버논의 튤립도 화란인 윌리엄 루젠이 일궈냈다. 1947년 이민 온 그는 남의 밭에서 인부로 일하며 모은 돈으로 5에이커의 땅을 구입, 1950년 ‘루젠정원(Roozengaarde)’을 창설했다(‘루젠’은 화란어로 튤립이 아닌 장미를 뜻한다). 밤낮없이 일한 루젠은 5년 뒤 ‘워싱턴 구근 회사’까지 매입, 스캐짓 밸리는 물론 미국 최대의 튤립 재배농가로 입신했다.
현재 약 2,000 에이커의 밭에 형형색색의 튤립과 수선화와 아이리스를 재배하는 루젠정원은 인근 ‘튤립타운’과 더불어 스캐짓 밸리의 관광센터 역할을 한다. 풍차와 함께 3 에이커 규모의 전시용 정원을 갖춘 루젠가르드에선 금방 따온 싱싱한 튤립은 물론 각종 모양과 크기의 튤립화분 및 구근도 구입할 수 있다. 전문가가 튤립재배에 관한 상담도 해준다.
이곳을 찾는 한인 관광객들은 대개 사진 찍기에 바쁘다. 문학소녀 출신들은 시상을 가다듬기도 할 터이다. 필자는 튤립꽃밭을 볼 때마다 이 광활한 토지에 한국특산물을 재배해 관광명소로 개발할 사업가는 왜 없는지 궁금해진다. 한인들이 단기 부동산투기에는 열을 올려도 루젠 가문처럼 2~3대에 걸쳐 규모 큰 사업을 일궈내는 데는 관심이 없는 모양이다.
기왕에 스캐짓 밸리의 튤립축제를 구경하러 가면 인근 마운트 버논과 라코너도 한바퀴 돌아봄직하다. 축제기간에 각종 문화행사가 함께 벌어진다. 이곳에 산재한 골동품상, 화랑, 박물관 등도 둘러볼 만하다. 다양한 식당에서 낯선 요리를 시식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시애틀 한인들은 대충 연중 나들이 스케줄이 있다. 봄에 고사리 따기, 여름에 조개 캐기, 가을에 고개 너머 사과 따러 가기, 초겨울에 송이버섯 캐기 등이 그런 것들이다. 첫 번째 나들이인 튤립시즌 후 뒤집혀진 바로 그 꽃밭에서 야생 시금치와 냉이를 캐기도 한다.
튤립은 보기보다 강한 꽃이다. 가을에 심은 뿌리가 차가운 땅 속에서 겨울을 견뎌야만 이른 봄 눈 속에서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 요즘 불황을 겪는 한인들이 배울만한 덕목이다.
윤여춘(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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