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생각
사람은 죽은 뒤 관 뚜껑을 덮고 나서야 진정한 평가를 받는다는 뜻의 사자성어 ‘개관사정(蓋棺事定)’은 두보의 시에서 비롯됐다.
“…죽은 오동나무가 거문고로 거듭 나고, 길가의 오래된 작은 연못에 용이 깃든다. 벼락과 광풍의 심산궁곡에 사는 것을 어찌 원망하랴. 대장부의 평가는 관 뚜껑을 덮은 뒤부터 정해지기 시작한다…”는 내용의 교훈적인 시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이 불러일으킨 벼락과 광풍이 어제 거행된 그의 국민장을 계기로 일주일 만에 수그러지게 됐다. 두보의 말대로 이제 관 뚜껑이 덮였으므로 인간 노무현, 대통령 노무현에 대한 진정한 평가도 시작될 터이다.
그동안 봉화마을을 비롯한 전국 각지와 해외공관에 설치된 분향소에 400여만명이 다녀갔고 국민장에도 각계인사 3,000여명이 참석했다. 신문, 방송, 인터넷에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이 홍수를 이루는 등 초기평가는 사뭇 긍정적이다.
필자는 우연하게도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을 서울에서 맞았다. 모친의 구순잔치로 가족들이 들떠있던 23일 아침, ‘노무현 전 대통령 음독’이라는 긴급 뉴스자막이 TV화면에 떠올랐다. 음독이 ‘투신’으로 바뀌더니 곧이어 ‘사망확인’이 보도됐다. 가족 모두 어리둥절했다. 잔치에 온 손님들도 한결같이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오죽하면 그랬겠느냐”는 동정론이 대세였지만 필자는 전직 대통령의 자살은 자신과 가족은 물론 국민과 국가에 덕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유서에 두보의 시처럼 ‘원망하지 말라’고 썼는데, 본인은 원망이 없었을까? 원망은 자살자들의 보편적 동인이다. ‘오래된 생각’이라는 마지막 구절도 섬뜩했다. 만약 그가 오래전 재임 시 탄핵소추 상황에서 그런 생각을 실행했더라면 상황은 훨씬 더 끔찍했을 터였다.
시애틀로 돌아온 뒤에도 심기가 불편했다. 대한민국 국민은 대통령 복이 지지리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초대 이승만은 임기중 하야한 후 망명했고, 박정희는 임기중 심복에게 암살당했으며, 전두환과 노태우는 퇴임후 옥살이를 했다. 윤보선과 최규하는 있는둥 없는둥 했고, 김영삼과 김대중도 ‘성군’이라는 말을 듣기에는 거리가 멀다.
노무현은 8명의 선대들과 확연히 달랐다. 대신 자신의 롤모델이었다는 아브라함 링컨과 많이 닮았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독학으로 변호사가 됐고, 7전8기의 정치경로를 거쳐 대통령에 당선됐다. 소외계층의 인권을 위해 헌신했고, 권위주의를 배척했다. 그가 시애틀을 방문한 2007년 6월30일 필자는 본 칼럼에 “노 대통령이 남은 8개월여의 임기동안 더욱 링컨을 닮아갔으면 좋겠다. 그러나 그의 비극적 최후는 결코 닮아서는 안 된다”고 썼었다. 그의 비극이 임기 중은 아니었지만 말이 씨가 된 것 같아 송구스럽다.
필자는 7년만에 한국을 방문해 7일간 머물면서 고국의 눈부신 발전상을 실감했다. 불황인데도 곳곳에 고층건물이 세워지고 있었고 거리에도 여전히 활기가 넘쳤다. 청계천에서 송사리를 확인했고 ‘예술의 전당’은 시설과 프로그램에서 시애틀의 베나로야홀보다 훨씬 다채로웠다. 친구 초대로 하룻밤 자고 온 강원도 산속의 리조트도 별천지였다.
노 전 대통령의 자살은 국가경쟁력에서 세계 20위권인 한국이 정치는 아직도 후진국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고, 미국의 케네디, 클린턴, 오바마와 달리 한국의 신데렐라 정치인들은 웅지를 펼 무대를 확보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재확인시켰다. 한국 정치무대에선 탤런트가 바뀌기보다 관중이 먼저 바뀌어야 할 것 같다. 필자의 ‘오래된 생각’이다.
윤여춘(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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