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튀’ 계주
‘오야붕’은 왕초라는 뜻의 일본말이다. ‘親分’으로 쓰고 ‘오야붕’으로 읽는다. 김정일은 북한의 오야붕이고, 빌 게이츠는 마이크로소프트의 오야붕이다.
일본인들의 사무라이 식 용어인 오야붕에서 ‘붕’을 떼 내면 한국여자들의 경제용어가 된다. 계(契)를 조직하고 운영하는 우두머리, 즉 ‘오야’(계주)이다.
그 오야가 곗돈을 챙겨 잠적한 소위 ‘계주 먹튀’ 사건이 최근 LA에서 또 터져 한인사회가 뒤숭숭하다. 식당주인인 이모씨가 오야였던 이 계가 깨지는 바람에 계원 40명이 400만 달러나 피해를 입었다. 다른 낙찰계 파동처럼 이씨도 남의 이름으로 여러 구좌를 들고 상순위 곗돈을 독식했다가 뒷감당을 못하자 한국으로 뺑소니쳤다.
한인사회의 계 파동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LA에선 올해에만 3~4개의 대형 계가 깨졌다. 특히, 거의 모든 한인상인들이 계에 들어있는 ‘자바시장’(다운타운 의류도매 밀집상가)에선 극심한 경기침체로 돈이 돌지 않자 작년 2월에 이어 올해 3월과 9월에 계속 대형 계가 깨져 상인들 사이에 “당신 계는 무사하냐”는 인삿말이 유행이다.
샌프란시스코에서도 낙찰계를 운영해온 오야가 지난 9월 잠적, 계원들에게 100만 달러의 피해를 입혔다. 지난 4월엔 뉴욕에서 20만 달러짜리 계가 깨졌고, 2월엔 오야가 곗돈을 먹고 튀진 않았지만 계원들의 곗돈을 계속 차용하다가 끝내 계를 깨는 바람에 계원들이 곗돈 대신 오야의 유아용품 가게에서 허접쓰레기 물건을 받아가야 했다.
미국만이 아니다. 삼국시대 이래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계는 배달민족이 이민 가는 곳엔 어디든지 따라간다. 캐나다에서도, 호주에서도, 파라과이에서도 계파동이 발생했다. 양반동네인 서북미는 조용한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신문사엔 계가 깨졌다는 제보가 심심찮게 들어온다. 피해 당사자들이 입을 닫아 기사로 보도되지 않을 뿐이다.
국어사전에 계는 “여러 사람이 같은 목적아래 돈이나 물건을 추렴하여 서로 운용하는 우리나라 고유의 협동자치기관의 하나”라고 풀이돼 있다. 취지에 따라 지역계, 산업계, 상호부조계 등으로 분류된다. 한인들이 사업자금 마련을 위해 통용하는 낙찰계는 산업계에 해당되고 계원들 간의 친목도모를 위주로 하는 번호계는 상호부조계에 속한다.
한인들도 번호계와 대부분 친숙할 듯싶다. 학창시절 부모가 번호계를 들어 어렵사리 조달해준 등록금으로 공부한 친구들이 여럿 있다. 미국에선 자고로 은행융자가 보편화돼 있지만 한인사회에선 직장, 교회, 동창회 등을 중심으로 번호계가 꾸준히 성행한다. 자녀 대학등록금, 모국방문, 크루즈 여행, 새 차 구입 등이 번호계의 보편적 용도이다.
문제는 낙찰계이다. 규모가 번호계보다 훨씬 크고 순번과 관계없이 가장 높은 이자를 제시한 계원이 곗돈을 탄다. 오야가 모은 30여명의 계원들이 서로 모른다. 또, 분명히 상법상의 다중계약이지만 계약서가 없기 때문에 계가 깨질 경우 법적 책임소재가 명확하지 않다. 곗돈이나 그 이자수입을 세금보고 하는 계원이 있다는 얘기도 못 들었다.
통상 불법행위로 간주돼온 한인들의 계는 1990년 샌프란시스코 연방파산법원의 기념비적 판결에 따라 합법행위로 인정받았다. 당시 판사는 “계는 합법행위이며 오야가 파산해도 깨진 계에 대한 책임은 면제되지 않는다”고 판시했다. 최근 콜로라도에선 44만 달러의 곗돈을 가로챈 오야가 형사범으로 기소돼 최초로 5년 징역의 실형을 선고 받았다.
계는 불황일수록, 그래서 은행융자가 어려울수록, 필요성과 위험성이 함께 높아진다. 본보 지면엔 시애틀 한인사회의 ‘먹튀 계주’ 뉴스가 계속 보도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윤여춘(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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