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 해
신문사 편집국이 기자들이 두들겨대는 타자기 소리로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든지, 서울에서 고향 대전까지 기차타고 5시간 걸려서 갔었다고 말하면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얘기라는 핀잔을 듣는다. 시간적으로나 상황적으로 ‘까마득한 옛날’이라는 뜻이다.
호랑이가 옛날에 담배를 피웠을리 없는데 이런 비유가 회자되는 건 아마 이조시대의 민화 때문인 듯싶다. 깊은 산 기암괴석 위에 소나무를 배경으로 흰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산신령(또는 도인)이 장죽을 물고 앉아 있고, 그 옆에는 으레 호랑이가 보디가드처럼 지키고 있다. 이런 민화는 영·정조 때 많이 나왔으므로 사실 까마득한 옛날은 아니다.
산이 많은 한반도에선 이조말까지도 호랑이에게 잡아먹힌 사람이 많았다고 했다. 그런데도 우리 조상들은 그 무서운 호랑이를 멍청이나 겁쟁이로 의인화한 얘기를 많이 만들어 냈다. 중국인들이 조선을 ‘호담국’(虎談國: 호랑이 얘기의 나라)으로 부른 건 그 때문이다. 불과 20여년전만해도 호랑이는 귀여운 호돌이 모습으로 올림픽의 심볼이 됐다.
‘호랑이와 곶감’(혹은 ‘호랑이와 소도둑’) 얘기는 누구나 다 안다. 어느 날 밤 우는 아기를 달래는 엄마의 말을 호랑이가 밖에서 엿듣는다. “울면 호랑이 온다. 뚝 그쳐!”하며 겁을 줘도 아기는 계속 울어댄다. 그러던 아기가 “여기 봐라. 곶감 있다”라고 엄마가 말하자 단박에 울음을 그쳤다. 호랑이는 곶감이 자기보다 훨씬 무서운 놈이라고 생각했다.
마침 그때 소도둑이 그 집에 들어와 호랑이가 소인 줄 알고 등에 올라탔다. 호랑이는 틀림없이 곶감이 자기를 잡으러 온 것으로 착각하고 죽을힘을 다해 달아났다. 동이 튼 후에야 호랑이 등에 타고 있음을 안 소도둑은 혼비백산해 뛰어내렸고, 호랑이도 “이제 살았다!”며 뒤도 안 돌아보고 줄행랑쳤다. 그 후 마을엔 호랑이도, 소도둑도 출몰하지 않았다.
“할멈, 할멈,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하며 떡 한 광주리를 다 뺏어 먹은 후 할멈까지 잡아먹은 교활한 호랑이 얘기도 있고, 나무꾼 어머니를 제 어머니인 줄 알고 돼지를 한 달에 한 마리씩 잡아다 문 앞에 놓고 간 효자 호랑이 얘기도 있다. 연암 박지원의 ‘호질(虎叱)’도 널리 알려져 있다. 과부와 바람피우던 고명한 북학선생이 그녀의 아들들에게 들켜 달아나다가 밭 한가운데 똥구덩이에 빠진다. 겨우 빠져나오자 호랑이가 그를 노려보고 서 있다. 북학선생이 살려달라며 손이 닳도록 빌자 호랑이는 유학자들의 위선을 엄히 꾸짖는다. 날이 샌 후 호랑이는 간 데 없고 농부들이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것을 안 북학선생은 “하늘의 높은 뜻에 고개 숙이고 땅의 곤고함에 무릎 꿇어 풍년을 빌었다”며 여전히 허풍떤다.
호랑이가 낀 고사성어도 많다. ‘여우가 호랑이의 위엄을 빌려 으스댄다’(차호위호(借虎威狐), ‘호랑이를 길렀다가 후에 화를 입는다’(양호유환(養虎遺患), ‘호랑이굴에 들어가야 호랑이 새끼를 얻는다’(불입호혈 부득호자(不入虎穴 不得虎子), ‘표범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표사유피 인사유명(豹死遺皮 人死遺名) 등이 그런 예이다.
새해 경인년은 호랑이 해이자 60년 만의 첫 백호 띠이다. 호랑이는 상상동물인 용을 제외한 다른 띠 동물들을 압도하는 백수의 제왕이다. 특히 2010년에 태어나는 아기들은 출중한 카리스마와 통솔력으로 크게 출세하게 될 것이라고 역술가들은 점친다. 그래서인지 올해는 출산율이 저조한 한국에서도 계획임신을 고려하는 젊은 부부들이 많다는 소식이다.
호랑이는 평원에서 떼를 지어 사냥하는 사자와 달리 심산유곡에서 혼자 사냥한다. 단체보다 개별적으로 능력이 뛰어난 한인들과 비슷하다. 새해는 ‘不入虎穴 不得虎子’의 각오로 불황과 싸워 이기는 한인 자영업자들이 많아지기를 비는 마음 간절하다.
윤여춘(편집인)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