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호랑이
19세기 중엽, 유럽 열강들은 제국주의 입김을 동쪽으로 뻗쳐 급기야 동아시아의 바람막이로 불렸던 청(淸)까지 침공했다. 처음에는 무서운 기세로 용감하게 대항하는 중국을 보고, 역시 아시아의 실력자로서 뭔가 있구나 하고 경계를 했다. 하지만 군함ㆍ대포ㆍ무장기선 등 가공할 무기를 동원해 진입한 영국군 앞에서 맥없이 쓰러지는 모습을 보고 유럽인들은 중국을 ‘종이 호랑이’라고 불렀다. 이후 홍콩을 넘겨주고, 치외법권까기 인정하는 강화조약인 영국과의 난징조약이 체결되고, 유럽제국들과 미국에게 나라가 잠식당하고 있어도 청나라의 조정은 위엄만 지키고 있었다.
지난해 4월 런던에서 개최된 G-20 정상회담에서 중국은 자신을 미국과 어깨를 견주는 강국으로 여겼고 오바마 역시 그것을 인정했다. 지난 30년간 매년 10%에 이르는 경제성장을 이룩한 측면만 보면 중국이 차세대 초강국으로 부상한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렇지만 국제정치 혹은 군사전략가 사이에서는 다른 의견이 있다.
한 예로 전략학자인 조지 프리드맨은 ‘21세기 예측’이라는 책에서 2020년 중국은 종이호랑이라고 주장한다. 만일 고속성장이 주춤할 경우 정치적 자금할당ㆍ경제통계 조작ㆍ부정부패 등 산적된 내부문제로 중국은 사회 전체가 주저앉을 것이라는 이유다.
겉만 번지르르한 종이호랑이는 중국의 전통사상 즉, 공자가 제시한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비는 아비답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는 명분론에서 뿌리를 찾을 수 있다. 한국인도 같은 의식구조에 예속돼 있다.
한국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캐나다인 교사는 “한국학생들 앞에서는 선생으로서 모든 것을 아는 체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학생들이 얕잡아 본다”고 개탄했다. 솔직하게 모른다고 말하면 교사라는 체면이 서지 않는 명분문화는 어처구니 없는 역사적 기록을 가졌다. 조선 태종 때 호랑이가 경복궁으로 들어와 임금의 침전에 접근하자, 명사수 김덕생이 화살 한발로 쏴 죽인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두고 조정은 논쟁에 휘말렸다. 임금의 목숨을 구한 것은 공로감이지만 신하가 감히 임금 쪽으로 화살을 쏜 것은 신하로서 명분을 상실한 행위로 용서가 안 된다는 싸움 끝에 결국 김덕생은 사형대에서 죽음을 맞았다.
이런 왜곡된 명분 가치관은 출신대학 이름 하나로 사람의 성격ㆍ인간성ㆍ지적 수준 등을 판단하고, 결혼대상자를 찾을 때도 상대자가 소속한 객체, 즉 가문ㆍ출신대학ㆍ직장 이름이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부각되는 사회를 만들었다.
한국의 직장에서 사원을 뽑을 때 보는 순서는 대학 이름. 성적 그리고 영어실력이라고 신년 첫날 SBS뉴스는 보도했다. 미국 직장에서 커뮤니케이션과 팀워크 기술을 우선시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접근이다. 전자는 명분, 후자는 실리를 택하는 것이다.
올해 조기전형에서 예일대학은 네 쌍둥이 지원자를 한꺼번에 합격시켰다. 학교성적ㆍ표준 점수면에서는 대부분의 한인 지원자들보다 뒤쳐지지만 구태여 아프리카 나이지리아에서 이민 온 부모아래 태어난 그들을 뽑아 “학문을 연구하는 대학답지 않은 방법으로 신입생을 선발했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그럼에도 명분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신입생 전형방법을 택하는 예일 대학의 이유는 대학이름이 전세계 매스컴을 통해 보도돼 광고비용 없이 공짜로 선전하는 방법, 즉 실리를 택하는 마케팅 전략에 있다.
명분보다 실리를 추구하는 전형방법 앞에서 성적표와 표준점수에 나타난 숫자 즉, 학생의 학생다움으로만 승부를 가리려는 지원자는 자신을 종이 호랑이로 키우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종이 호랑이는 쉽게 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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