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세월 건넜다. 구차하고 야박한 세월을 건넜다. 다시는 볼일 없는 불모의 세월을 건넌 것이다. 아니다. 아쉬울 것 없는 그 해를 버리고 핑계 삼아 참한 꿈이라도 그려볼 순백의 새로운 해를 받은 것이다.
그러나 금세 무슨 용빼는 수가 있으랴마는, 새해에 걸어보는 소망이 보다 절절한 것은 겪고 있는 작금의 신산이 점점 더 매워지는 듯해서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아등바등 마음 태운다 해서 홀연, 호기를 맞게 되는 것도 아니다. 물에 빠지면 바닥까지 내려가는 지긋한 용기가 있어야 차고 오를 수 있다고 했다. 함박눈 펑펑 쏟아 질 때는 실없이 빗자루 들고 이리저리 절 마당 환칠하지 말고, 하늘 밑천 동날 때를 기다려야한다는 말도 있다. 무슨 기특한 언약이 있는 것도 아닌 바에야, 구시렁거리지 말고 내 품 팔고 있는 곳, 내 서 있는 그곳에서 조신하라는 충고일 것이다.
그러나 넘어진 김에 쉬었다 간다고 남의 처마 밑에 자리 펼 딱한 처지가 아니라면, 이 때다 하고 몸 채비 마음 채비 알차게 하면서 시절을 엿봐야 할 것이다.
반면 절망에 걸려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 세상 돈도 명예도 사랑도 지레 포기해 버림으로서, 황막한 광야를 달리거나 자진해서 자진(自盡)은 말아야겠다. 모든 것을 잃어도 다 잃은 것은 아니라는 말이 있다. 이 해도 마음 단단히 챙겨 살뜰히, 야무지게, 찬찬히 일상을 꾸려갈 일이다.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 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간다.’ 물론 도종환 시인의 ‘담쟁이’라는 제목의 시다.
이 시는 지난 해 7월께 한국경제신문에서 직장인 100만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내 인생의 시 한편은’이란 설문 조사에서 1위로 선정된 바 있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절망의 벽 앞에서 포기하지 않고 한 발짝씩 함께 극복해가는 불굴의 용기와 희망을 담아, 장엄한 생명력을 노래한 절창이다.
머지않아 살바람에 묻어온 봄맛을 느끼게 될 것이다. 먼저, 봄의 전령이랄 수 있는 매화가 온 산야에 꿈꾸듯, 몽롱하고 화사하게 피어오를 것이다. 매화나무는 비록 지독한 추위와 눈발 속에서 꽃을 피워도 결코, 봄을 다투지 않는다고 한다.
엄혹한 시련을 속히 벗어나려는 버거운 열망과, 때맞춰 꽃으로 터질 그 날을 기다리는 단호한 결기가, 서로 조응하는 매화의 품성은 고고하고 엄준하다.
기회는 준비하고 기다릴 줄 아는 자의 눈에만 보인다고 한다. 그리고 생각은 에너지며 자석과 같다고 했으니, ‘긍정’이 주는 주술적(?) 힘을 믿고 정성을 다하면, 머잖아 시린 등에 온기 도는 영험도 얻게 될 것이다.
그래도 아름다운 세상, 이 세상 소풍 끝내고 하늘로 돌아간 천상병 시인이 생전에 남긴 안심 주문이다. ‘괜찮다 괜찮다 다 괜찮다’
박재욱 / 나란타 불교아카데미 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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