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세칙 불씨 한인회-연합회로 양분
76년 14대 한인회장 선거 당시 후보자격요건 놓고 분열
12월 한인회 반대 인사들 중심 한인연합회 발족
15대 선거서 이성종 후보 당선시키고 연합회 자체해산
▲15대 한인회장 후보자 등록서류 확인...와이셔츠 바람에 앉아있는 이성종과 문쪽에 손을 들고 서있는 박지원의 모습이 보인다.
뉴욕한인회는 1975년 들어 김정원 회장을 맞아 제법 활기를 띠었으나 김회장이 본업인 변호사 일에 지장이 많다는 이유로 그해 10월 갑작스런 사퇴를 하게 되었다. 표면상 이유는 그랬으나 일부에서는 그가 평소에 희망해 오던 본국 정치에 뛰어들기 위해 사퇴했다는 설이 제기됐다. 어쨌든 그의 사퇴에 따라 부회장이던 김상수가 잔여임기 6개월을 채우게 되었다. 76년에 접어들자 자연스레 차기회장 선거가 이슈가 되었고 그 세칙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선거관리위원회가 전에 없던 새로운 후보자 자격 규정을 삽입하는 바람에 말썽이 생겼던 것. 이때 한인회 이사회(이사장 김정희) 결의로 추가된 피선거권자의 자격요건은 1.뉴욕에 5년 이상 거주한 교포 2.반공사상이 투철한 교포 3. 전직회장 3인 이상의 추천을 받은 자등으로 규정했다. 이 규정은 당시 한인회장 추대설이 나오던 김재택 (잔 제이대 교수)의 등록을 사전에 봉쇄하려는 의도가 아니냐는 의구심을 던져 주었고 그를 지지하던 인사들로 부터 항의를 받기에 이르렀다. 김재택은 그 당시 뉴욕 거주기간이 5년에서 불과 3개월 정도 모자라는 기록을 갖고 있었다. 선거세칙에 대한 찬반 여론이 고조되고 그와 같은 소용돌이 속에서 입후보 당일 김재택 측 서류가 웬일인지 접수되지 않았다. 결과 김정희-김병렬 팀이 76년 4월10일 실시된 정기총회 및 제14대 뉴욕한인회장 선거에서 단독 입후보로 당선되었다.
김재택을 지지하는 인사들은 범 뉴욕한인회 총회를 열고 4월10일 소집된 정기총회의 무효와 선거를 백지화 하고 재선거 실시를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다시 열흘 후에 뉴욕한인회 선거대책위원회를 구성, 위원장에 전임 한인회장 한영교, 이범선, 장용호등을 선임하고 6월 하순 새로운 선거를 실시하도록 종용했다. 그러나 일단 한인회장에 당선된 김정희 회장은 부회장 당선자 김병렬 등 4인을 시켜 반대파를 무마하려 접촉을 시도했으나 접촉과정에서 그들마저 사퇴하고 반대편에 서게 됨으로써 더욱 난처한 입장에 빠지게 되었다.
그와 같은 평행선이 지속되다가 그해 12월 4일 한인회에 반대하는 인사들을 중심으로 뉴욕한인회연합회가 공식 발족되고 회장에 김재현 변호사를 추대했다. 이로서 뉴욕한인사회는 두 갈래로 분열되어 서로를 비방하는 바람직하지 못한 상황이 한동안 연출됐다.
77년 한해는 두 한인회가 존속하면서 서로 간 정통성을 주장하는 양분된 모습을 보였다. 김정희의 14대 한인회는 선거당시 선거관리위원장을 맡았던 민승연을 이사장으로 추대하고 공석이 된 부회장에는 박지원을 임명했다. 그리고 이듬해 치러지는 차기회장 선거 후보로서 박지원을 점찍고 있었다. 반대로 연합회측은 제15대 한인회장 선거가 다가오면서 청과상조회 주도로 은연중 후보자를 물색하던중 당시 상록회장이던 김재철을 옹립했으나 본인의 고사에 따라 청과상조회 이성종 회장을 강력한 후보로 내세우게 되었다. 이로서 선거판은 박지원, 이성종 후보로 좁혀지면서 인신공격이 난무하는 선거전 양상을 보였다. 이에 따라 한인회 이사회는 78년 4월2일 실시 예정이던 15대 한인회장 선거를 무기 연기하는 결의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이 무렵 14대 한인회와 뉴욕한인연합회로 갈라진 한인사회의 분열에 식상한 한인들은 어떤 방법으로든 한인사회가 단합되어야 하겠다는 중론에 도달하게 되었고 여기에 회원수가 많은 청과상조회가 뛰어들게 되었다. 일단 연기됐던 선거는 임기 마지막 날인 4월30일에야 실시되었다. 열전 속에 뚜껑을 열어본 결
과 총 투표자 1천 4백여 표 가운데 이성종 후보가 불과 96표 차이로 신승을 거두게 되었다. 제15대 한인회가 출범하자 그때까지 독자적인 노선을 걷던 뉴욕한인연합회가 동포사회의 발전을 위해 자체 해산하는 방식을 취했다. 그들은 해단식까지 하면서 양분된 한인사회를 하나로 통합하는 결의를 하게 된 것이다. 그런 과정을 거치며 선거세칙으로 말미암아 발생했던 한인사회 분열이 2년여 만에 해소되었다. 1978년 5월 임기가 시작된 15대 한인회는 출범과 더불어 커다란 선물을 안게 되었다. 회장에 당선된 이성종은 이사장에 김재택을 추대함으로써 그간의 상처를 다소나마 치료하는 모습을 보였다.
당시의 상황을 한국일보 20년지는 1976년 개관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뉴욕한인회가 유명한 선거 일화를 낳고 크게 분열되는 사태를 맞았다. 후보자격을 전격적으로 수정한 이사회는 전임 이사장 김재택씨의 뉴욕거주 기한(5년에서 3개월 모자람)을 걸어 입후보를 철회하게 만들고 김정희씨를 단독 입후보시켜 당선시키는 이변을 만들었다. 이에 항의, 뉴욕한인연합회가 따로 발족, 김재현 변호사를 회장에 추대했다. 이어 77년 개관에서는 그 후반부를 다음과 같이 매듭지었다. 분열된 한인회가 청과상조회의 힘으로 합쳐지게 되었다. 상조회는 한인회장에 상록회장을 업는 수습책을 내놓았으나 상록회장의 거절로 상조회측이 이성종 후보를 내어 당선시켰으며 연합회도 동조, 스스로 해산해 한인회가 단일화 되었다.
▲김정희 14대 한인회장
▲당시 선거관리위원장 민승연(왼쪽)과 한인연합회장에 선출된 변호사 김재현(오른쪽)
참모가 서류접수 하지않아 지금도 의문
한인회장 후보였으나 등록 안한 김재택 교수
16년후 22대 한인회장에 당선
이때 한인회장 후보로 추대되긴 했지만 선거도 치러보지 못한 채 화제의 인물이 되었던 김재택은 세월이 훨씬 지난 작년 필자와 만난 자리에서 옛날 얘기를 하던 중 76년 초에 있었던 문제의 선거세칙에 화제가 이르자 실소하며 지금도 한 가지 의문점이 남아 있다고 말했다. 당시 선거세칙에 반공의식과 뉴욕거주 기간을 추가했는데 반공은 군대를 갔다 온 사람이니까 문제가 될 것 없었고 거주기간은 자신을 한인회장 시키지 않으려고 그랬던 것이라고 풀이했다.
그때 본인이 후보등록을 취소시켰거나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 부분에 대해 자신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등록이 되지 않았고 지금까지 의문으로 남아있다는 얘기였다. 당시 후보 등록서류를 갖고 있던 참모(이모)가 등록 자체를 하지 않았던 것인데 왜 그가 등록을 하지 않았는지 지금도 모르겠다는 말이었다. 만약 그때 등록이 일단 됐더라면 후보 자격을 놓고 양측의 대립은 한층 격렬해졌을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후보등록 자체를 자신의 참모가 하지 않았던 점에 대해서는 의문을 풀지 못한 모습이었다.
한인사회 분열로 인해 김정희-김재택의 관계는 한때 소원했으나 그후 자연스레 만난 자리에서 화해의 악수를 나눴고 김재택은 그로부터 16년이 지난 1992년 제22대 한인회장에 당선되어 임기를 마쳤으므로 두 사람 모두 전직 한인회장의 똑같은 입장이 되었다. 요즘은 뉴욕한인회 역대 회장단 협의회에 함께 참석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조종무<언론인,한국 국사편찬위원회 해외사료 조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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