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캐롤(Oh, Carol)’이라는 팝송이 60년대 초 크게 히트했다. “당신이 떠나면 나는 분명히 죽어버릴거야”하는 비장한 가사와 달리 곡조와 리듬이 매우 경쾌하다. 닐 세다카가 부른 이 노래는 비슷한 무렵에 나온 폴 앤카의 ‘다이애나(Diana)’와 함께 당시엔 오지였던 한국에서도 필자 또래의 청년들은 물론 코흘리개까지 흥얼댔었다.
세다카는 그후 10여년간 히트곡이 없다가 70년대 중반 ‘배고팠던 시절(Hungry Years)’을 내놨다. “지난 세월, 우리는 뜬금없는 사다리에 올라 허둥지둥 공중누각을 지었소. 원했던 걸 모두 손에 쥐었소. 그러나 지금 나는 땡전 한푼 없었던 먼 옛날이 그립소. 그땐 지금 갖고 있는 것들이 훨씬 더 좋아 보였소. 먼발치에서 봤으니까…”
배고픈 세다카는 ‘오 캐롤’ 외에 ‘캘린더 걸’ ‘그대는 나의 모든 것’ ‘일기’ 등을 잇달아 히트시켰지만 배부른 후엔 게을러져 레코드회사의 전속계약도 해지됐다. 카니 프란시스, 카펜터스 등 후배 가수들의 노래나 작곡해주던 그는 스스로 물불 가리지 않고 뛰어 정상에 올랐던 옛날을 그리며 청승맞은 발라드풍의 ‘배고팠던 시절’을 불렀다.
세다카는 택시운전사였던 유대인 이민자 아버지로부터 ‘헝그리 정신’을 배웠다. 그 정신이 왕성할 때 성공했고, 시들었을 때 실패했다. 줄리아드 음대의 조기입학생으로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 도전할 만큼 재능 있는 피아니스트였지만 얼마 못 가서 사촌누이인 이디 골메나 고교 동급생이었던 닐 다이아몬드의 인기에 빛이 가리게 됐다.
‘헝그리 정신’이 강조되는 분야가 스포츠다. 특히 권투가 그렇다. 영화 ‘록키’의 주인공 발보아(실베스터 스탤론)는 프로선수들에게 늘씬 얻어맞는 스파링 파트너가 돼주고 잔돈푼을 얻어 쓰는 백수였지만 악착같은 ‘헝그리 정신’을 살려 일약 세계 챔피언이 된다.
한국엔 실존하는 록키 발보아가 많았다. 1966년 이탈리아의 벤베누티로부터 미들급 타이틀을 빼앗아 한국 최초의 세계 챔피언이 된 김기수가 그렇고, 70년대 중반 적지인 남아공에 날아가 ‘챔피언을 먹은’ 홍수환이 그렇다. 80년대엔 세계 챔피언이 30명 가까이 쏟아졌다. ‘복싱’하면 한국이었다. 한국선수끼리 세계 타이틀전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헝그리 정신’의 제물이 된 복서도 있다. 김득구이다. 빈농출신인 김은 1982년 라스베이거스에서 체력이 한수 위인 레이 ‘붐붐’ 맨시니에 도전했다가 14라운드에서 턱을 강타 당해 쓰러진 후 의식을 잃었다. 나흘간 식물인간 상태였던 김은 어머니가 급거 날아와 산소마스크를 뗀 후 숨을 거뒀고, 어머니는 3개월 뒤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복싱 왕국이었던 한국엔 20여년이 지난 지금 세계 챔피언이 한 명도 없다. 구태여 헝그리 정신을 발휘해서까지 권투를 할 만큼 배고픈 복서들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 헝그리 정신만으로 세계 챔피언이 되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고 봐야할 것 같다.
이번 밴쿠버 BC 동계올림픽에서 경이적인 성적을 거둔 한국선수들이 그 예다. ‘깡’으로 하는 권투와 달리 동계올림픽 스포츠는 필자 세대엔 귀족 스포츠였다. 세다카가 ‘배고팠던 시절’을 불렀던 무렵까지도 절대다수의 한국국민은 배가 고팠다. ‘민생고 해결’이 여전히 시급한 과제여서 동계 올림픽 금메달은 꿈도 못 꿨다. 지금 북한이 그렇다.
김연아와 이승훈 등의 이번 장거는 크게 신장된 국력, 그에 따른 스포츠 인구의 저변확대와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훈련 덕분이다. 그러나, 이들에게도 헝그리 정신은 필요하다. 배가 고파야한다는 뜻이 아니다. ‘헝그리 정신’이라는 책을 쓴 조관일 박사는 “나태와 무기력을 치유하는 활력의 정신, 초심을 견지하는 겸손의 정신, 풍요의 수렁에 빠지지 않는 각성의 정신”이 바로 헝그리 정신이라고 정의했다. 윤여춘(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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