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때 열 살이었어. 왜놈들 무서워 밤에만 만세 부르고 다녔지. 아버지는 애국지사들이 중국으로 몰래 망명갈 수 있게끔 강 건너 단둥으로 배를 태워 보냈어. 어머니는 닭을 잡아주고 했지. 그러다 아버지가 왜경에 붙들려가 죽도록 맞고 온몸이 피멍이 돼 돌아오시기도 했어. 아직도 눈앞의 일처럼 생생해.”
버지니아 애난데일의 조선옥 할머니. 19일로 만 100세를 맞은 조 할머니의 기억력은 생생한 말처럼 또렷하다.
1910년, 한일병합의 해에 이 세상에 난 조 할머니의 한 세기의 개인사에는 일제 통치와 해방, 6.25 전쟁 등 한국의 험난한 현대사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고향인 평북 의주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만주, 중국에서 잠시 살다 1947년 가족과 함께 월남했다. 열여덟 살에 결혼한 남편과는 딸 하나를 두었으며 1979년 남편과 사별했다.
조 할머니는 “전쟁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가족 모두 건강하게 살아있다”며 “100년을 살았지만 하나도 보람된 게 없고 나라에 공헌한 것도 없다”고 겸양해했다.
조 할머니 가계는 독실한 기독교 집안. 그의 조부는 기독교를 평양 등에 전파한 인물로 조 할머니도 어린 시절 가족들과 함께 주일마다 짚신을 허리에 매고 갈아 신으며 30리길의 교회를 다녔다 한다.
그동안 노령에도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증손들을 키우던 그는 2005년 아예 미국으로 와 외손녀인 김순옥씨(유진한방보신원 원장) 집에서 기거하고 있다. 그의 집에는 딸인 전순란씨(80세)와 김순옥씨의 자녀 등 미국에서는 드물게 4대가 함께 오순도순 살고 있다.
김순옥씨는 “4대가 함께 사니 아이들에 자연스레 효 교육도 되고 어른들은 젊은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니 정신건강에도 좋다”고 말했다.
조 할머니의 하루는 건강한 노년의 일상을 잘 보여준다. 그는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1시간동안 기도를 한 후 이원상 원로목사(와싱톤중앙장로교회)의 라디오 설교를 청취하고 한국일보를 정독하는 것으로 아침을 보낸다.
조반을 든 후에는 마당에 심은 상추나 고추를 가꾸고 장미꽃도 손질한다. 낮에는 선교 TV 프로그램을 시청하거나 자손들과 대화를 나누며 소일한다. 가끔은 김치도 담그고 지팡이에 의존하지만 아직 외출도 자유롭다.
외손녀인 김순옥씨는 “할머니는 신문을 1면부터 끝까지 하나도 빼지 않고 다 읽고 가족들한테 그날의 뉴스를 전해주신다”며 “늘 마음이 평화스럽고 담대한 성격이라 건강을 타고나신 것 같다”고 말했다.
조 할머니는 “평생 병원 한번 안갈 정도로 아픈데 없이 산다”며 “가리지 않고 음식을 잘 먹고 매사 낙천적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는 게 도움이 된 것 같다”고 장수 비결을 귀띔했다.
앞으로 10년은 아픈데 없이 거뜬하게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조선옥 할머니는 “제 여생의 바람이 있다면 자손들이 모두 사회에 나가 올바르고 보람되게 사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종국 기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