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은 미국 최악의 인종 폭동으로 꼽히는 로스앤젤레스(LA) 폭동이 일어난 지 20년 되는 날이다.
지난 1992년 4월29일 로스앤젤레스 인근 시미밸리 법원에서 흑인을 무자비하게 구타한 백인 경찰관들에게 무죄 평결이 내려지자 흑인들은 그동안 쌓였던 불만을 폭력과 방화, 약탈로 폭발시켰다.
이들 경찰관은 1년 전 고속도로에서 차를 몰고 가던 흑인 로드니 킹이 정지 지시를 무시했다는 이유로 곤봉으로 마구 때린 끝에 중상을 입혀 기소됐다.
당시 킹을 구타하는 장면은 새로 산 캠코더를 시험하던 한 시민이 생생하게 촬영해 언론에 공개하면서 흑인 사회의 분노를 샀다.
그런데 당연히 단죄받아야 할 경찰관들에게 무죄가 선고됐다는 소식에 흑인들이 들고일어났다.
엿새 동안 이어진 폭동의 최대 희생자는 한인들이었다.
백인들에게 받는 차별에 대한 분노를 엉뚱하게도 한인들에게 쏟아낸 것이다.
피해 업소 1만여개 가운데 2천800여개가 한인 업소였다. 전체 피해액 7억달러 가운데 절반이 넘는 4억 달러의 피해가 한인 몫이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로스앤젤레스 한인타운은 폭동의 상처를 찾아볼 수 없다.
폭동의 원인이 됐던 인종간 갈등과 반목도 많이 완화됐다.
하지만 로스앤젤레스 한인 사회에는 20년 전 시커먼 연기와 함께 삶의 터전이 사라진 트라우마가 아직도 남아 있다.
여전히 인종 폭동의 불씨는 잠복해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두번 다시 이런 일을 당해서는 안된다는 다짐에서 뛰고 있는 한인들도 여럿 있다.
◇잊혀진 폭동..상처는 아물었지만 불씨는 여전
1992년 LA 폭동이 휩쓸고 간 한인타운은 그야말로 잿더미로 변했다.
한인타운의 업소 가운데 90%가 불에 타거나 약탈당했다.
곳곳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폐허 속에 망연자실한 모습으로 서 있는 한인 상인들의 모습은 그러나 이제는 흑백 사진의 한 장면일 뿐이다.
로스앤젤레스 한인타운에서 LA 폭동의 흔적을 찾기란 어렵다.
12만여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대형 건물과 화려한 쇼핑몰이 즐비한 한인타운은 로스앤젤레스에서 가장 역동적인 지역으로 발돋움한지 오래다.
2008년 미국을 강타한 경제 위기의 여파로 다소 활기는 떨어졌지만 한인타운은 빈땅이 거의 없을만큼 개발이 빨랐다.
주민들의 뇌리 속에서도 폭동의 기억은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로스앤젤레스 통합교육청은 학교에서 LA 폭동을 가르치지 않는다. 캘리포니아주 교육부는 교과 과정에 LA 폭동을 포함시키지 않았고 교과서에도 실리지 않았다.
30대 이하의 젊은 세대들은 기억을 못 하는 게 아니라 아예 사실 자체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고 로스앤젤레스타임스는 지적했다.
한인타운을 중심으로 로스앤젤레스에서 거주하거나 사업을 하는 한인 가운데 상당수는 LA 폭동을 경험하지 못했다.
14년 전 이민와 한인타운에 사는 조재영(32)씨는 "이곳에서 흑인들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사실은 얘기를 들어서 알고는 있다"면서도 "솔직히 자세한 내용은 모른다"고 말했다.
폭동의 가해자 격인 흑인과의 접점도 크게 줄었다.
폭동 당시 한인이 하던 사업이라야 80%가 소매점이나 주류 판매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60%대로 떨어졌다.
한인이 상대하는 고객도 흑인에서 라티노로 바뀌었다. 한인타운에서 흑인 인구는 이제 5%에 불과하다. 흑인이 로스앤젤레스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도 겨우 9% 수준이다.
폭동의 진원지가 됐던 과거의 흑인 집단 거주 지역 사우스LA는 라티노가 최대 인구로 부상했다.
한인과 흑인 사이에 갈등의 원인이 됐던 ‘한인 가게 주인-흑인 손님’의 구도가 희석된 셈이다.
이곳에서 7년째 잡화상을 운영하는 한성근(43)씨는 "손님 가운데 흑인은 열명 중 두명이 채 안된다"며 "물건 구색도 라티노 위주로 갖춰놓는다"고 말했다.
흑인 사회와의 꾸준한 소통과 화합을 위한 노력도 상당한 결실을 봤다.
폭동 당시 사우스LA에서 하던 주류 판매점이 몽땅 불에 타는 피해를 봤던 허종(67) 씨는 "흑인들에게 장학금도 주는 등 오랫동안 유대 관계를 다져왔다"면서 "이제 한인을 수전노로 보는 시각은 많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그러나 폭동의 내연성은 여전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흑인 사회가 20년 전이나 다름없이 고실업과 저소득에 허덕이는 구조적 문제가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 백인 뿐 아니라 라티노와 아시안 등 이민자들에게도 이들은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다.
미국 인종 갈등을 주로 연구한 장태환 교수(UC리버사이드)는 "흑인과 라티노 간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면서 "흑인들은 마지막 보루였던 사우스 LA 지역마저 라티노에게 뺏기고 있다는 위기 의식과 자신들의 피로 만든 민권 운동의 성과가 라티노 이민자에게 넘어간다는 데 불만이 많다"고 분석했다.
20년 전 LA 폭동이 흑인과 백인 사이의 문제가 발화점이었지만 피해는 한인에게 몰렸듯이 흑인과 라티노 간 분쟁이 발생하면 중간지점의 한인에게 불똥이 튈 수 밖에 없다는 전망이다.
허종 씨 역시 "다민족 사회에서 살아간다는 게 항상 조마조마하다"면서 "우리가 흑인이나 라티노들과 잘 지내고 있다고 해서 안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한인 정치력 신장이 급선무..힘있어야
"로스앤젤레스에 다시 그런 대규모 폭동이 일어난다면 경찰은 맨먼저 어디를 보호할까요?"
미주한인총민주당협회 브래드 리 회장은 대학생 때 LA 폭동을 겪었다.
로스앤젤레스 한인커뮤니티변호사협회 회장을 지낸 그는 한인 사회가 정치적 힘을 갖지 않으면 또 다시 인종 갈등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상권이 발달한 곳은 다운타운과 한인타운, 그리고 베벌리힐스 지역. 한인타운 서쪽이 베벌리힐스이고 동쪽에 다운타운이 자리잡고 있다. 딱 중간에 끼어 있는 곳이 한인타운이다.
LA폭동 때도 백인 주류가 자리 잡은 다운타운과 베벌리힐스 지역은 경찰과 주방위군이 철통같이 방어했다. 군경의 방어선을 뚫을 엄두를 내지 못한 폭도들은 주로 한인타운 업소를 먹잇감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역시 변호사인 한미연합회(KAC) 그레이스 유 사무국장은 "LA 폭동 때 어린 대학생이었지만 경찰이 한인타운을 폭도들 손에 내맡기고 수수방관한 것을 보고 분했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말했다.
원로 재미 언론인 이경원 씨는 미국의 주류 언론이 흑인들의 불만을 한인에게 향하도록 교묘하게 유도했다고 보고 있다.
이 씨는 LA폭동 당시에도 한인과 흑인의 갈등에만 초점을 맞춰 보도한 주류 언론의 행태를 비판하는데 앞장섰다.
로스앤젤레스 지역 언론은 LA폭동 20주년 관련 기사를 게재하면서 흑인을 차별과 부당한 대우를 당한 ‘피해자’로 묘사한다.
가장 큰 피해를 본 한인에 대한 배려는 인색하다.
경찰과 군, 그리고 주류 언론의 이런 행태는 결국 한인의 정치력이 미약하기 때문이라는 게 로스앤젤레스 한인들의 공통된 진단이다.
그레이스 유 사무국장은 "한인이 다시 이런 일을 당하지 않으려면 주류 사회의 존중을 받아야 한다"면서 "미국에서 존중받는 길은 정치적 힘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브래드 리와 그레이스 유 등 젊은 한인 변호사와 활동가들은 한인 정치력 신장을 위해서는 한인 사회가 한 목소리를 내고 정치적 권리를 쟁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로스앤젤레스 한인 사회가 정치력 신장을 위해 주력하는 사업은 유권자 등록 촉진과 선거구 조정 운동이다.
인구 400만명의 로스앤젤레스시를 움직이는 실세는 15명의 시의원이다.
시의원 15명 가운데 흑인은 무려 3명. 인구 비율이 10%에 미치지 못하지만 똘똘 뭉치는 흑인 사회의 결집력이 낸 성과물이다.
로스앤젤레스시 인구의 12%를 차지하는 아시아계 시의원은 한명도 없다.
선거구 조정 운동은 한인타운을 비롯한 아시아인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을 하나의 선거구로 묶어 아시아계 시의원이 탄생할 여건을 만들자는 것이다.
한인들이 주축이 된 아시아계 단일 선거구 확정 운동은 일단 로스앤젤레스 선거구조정위원회에서 기각됐지만 한인 사회의 정치적 잠재력이 부각되는 성과를 얻었다.
유권자 등록 운동도 오는 11월 대통령 선거와 연방 의원 선거를 앞두고 가속 페달을 밟을 전망이다.
미국 시민권을 지닌 한인 유권자 등록률은 60% 안팎으로 추산된다.
백인이나 흑인들은 80%에 이른다. 투표율도 중요하지만 미국 정치판에서는 일단 유권자 등록률이 높은 커뮤니티는 무시하지 못한다.
이와 함께 더 많은 한인이 선출직 공직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최근 로스앤젤레스 지역 연방 하원의원 선거에 2명의 한인이 출사표를 냈고 로스앤젤레스 시의원 선거에도 한인 3명이 각축을 벌이고 있는 것은 고무적인 현상이다.
장태환 교수는 "한인 사회의 정치력을 신장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라면서 "한인 사회의 정치적 위상을 높이는 것은 앞으로 한인의 미국 사회 정착에 굉장히 중요하다"고 단언했다.
◇기념 행사 봇물..한인 사회 들썩
LA폭동이 로스앤젤레스 한인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만큼 20주년을 맞아 한인 사회는 다양한 LA 폭동 관련 행사를 연다.
행사는 폭동의 의미와 과제를 짚어보는 학술 행사와 이해의 폭을 넓히고 공감대를 이루려는 문화행사, 한인 사회의 외연을 확장하려는 이벤트 등 다양하다.
25일 4.29기념재단은 한미교육연구원, 한인역사박물관과 공동으로 4.29 기념식과 세미나를 개최했다.
폭동 피해 당사자들의 증언과 폭동이 남긴 사회학적 의미를 주제로 학자들의 토론이 열렸다.
28일에는 ‘4.29를 대면하다’는 주제로 UC리버사이드 김영옥재미동포연구소 주최 학술회의가 열린다.
이 학술회의 역시 LA 폭동 경험자들의 회고와 한인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논의한다.
한인기독교커뮤니티개발협회는 27일 ‘20년 후:대화의 날(20 Years Later: A Day of Dialogue)’을 주제로 토론회를 연다. 이 단체는 29일 한인, 흑인, 라티노 등 로스앤젤레스의 다양한 인종 커뮤니티가 참가하는 평화 대행진을 기획했다.
25~28일 CGV에서 데이비드 이 변호사가 제작한 LA폭동 다큐멘터리 영화 ‘컬러의 충돌(Clash of Color)’이 상영된다.
재미대한권투협회는 28일 인종화합 권투대회를 연다. 김동실 라인댄스 클럽은 한흑 친선 라인댄스 모임을 개최한다.
한인이 주축이 된 봉사단체 파바월드는 세계적인 자선 단체 메이크어위시와 함께 28일 화합과 사랑을 다지는 걷기대회와 공원 청소 행사를 벌인다.
로스앤젤레스 시장은 27일 시청에서 4.29를 기리는 리셉션을 연다.
(로스앤젤레스=연합뉴스) 권 훈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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