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들·딸이 방치한 아이 맡아 황혼기에 또 다시 부모역할 체력도 돈도 만만찮지만 슬픔 딛고 잘 크는 모습 보면 삶의 벅찬 환희 맛 볼게 돼
▶ 미 ‘할머니-엄마’가정 40년만에 최고
조부모가 손주를 돌보는 조손가정이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미국은퇴자협회(AARP)에 따르면 조손가정의 비중은 지난 40년래 최고수준이다.
하루 중 가장 편안한 시간대는 고된 일과를 마치고 달콤한 휴식에 들어가는 황혼녘이다. 시간 단위를 연장해도 결론은 동일하다. 고단한 삶의 굴레에서 벗어나 수고로웠던 세월의 결실을 수확하는 황혼기가 인생의‘골든타임’이다. 정직하게 땀 흘려 가계를 세우고, 가족부양의 의무를 마친 뒤 퇴역한‘노병’들에게 황혼기는 달콤한 휴식시간이 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현실은 종종 기대와 표준을 무시한다. 나이 들어 손주 양육의 의무를 떠맡게 된 조부모의 경우도 여기에 속한다.
이제 막 짐을 내려놓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본인의 계획이나 의지에 상관없이 또 한 차례 부양의 수레바퀴에 휘말린 조부모의 수는 전국적으로 250만명을 헤아린다. 이 중에는 여덟 살짜리 손녀를 키우는 도로레스와 래리 킹 부부도 포함되어 있다.
킹 부부의 아들과 여자 친구는 핏덩어리 딸을 세상에 던져 놓은 채 각자의 길을 따라 어디론가 흩어졌다. 그리곤 그뿐, 딸 앰버의 생일날이나 명절에 전화 한 통 하지 않았다.
앰버는 공부 잘하는 사랑스런 성격의 아이로 자라고 있지만 할머니 도로레스는 늘 마음 한구석이 편치 않다. 친부모와의 완전한 절연이 앰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가늠하기 힘들다.
도로레스는 “전혀 내색을 하지 않지만 앰버는 틀림없이 부모에게 버림을 받았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며 “어린 것이 얼마나 가슴이 아프겠느냐”며 눈시울을 붉혔다.
조부모의 부모 노릇 대행은 비단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하지만 문제는 조부모가 손주를 돌보는 이른바 ‘조손가정’(gramdfamily)이 증가추세를 보인다는 점이다. 미국은퇴자협회(AARP)에 따르면 조손가정의 비중은 지난 40년래 최고수준이다.
델라웨어 레호보스 비치의 임상심리치료사인 주디 피어슨은 “조부모가 손주의 새로운 안전망 역할을 하고 있고, 이같은 현상은 앞으로 계속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조손가정의 증가 이유는 다양하다. 아이의 부모 사망, 약물남용, 교도소 복역, 정신질환, 해외 파병, 10대 임신, 양육 포기, 학대 등이 여기에 속한다.
경제도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다. 22~32세 연령대의 실업률은 55~64세 연령층의 실업률에 비해 두 배나 높다. 실직과 취업난으로 자녀부양 능력을 상실한 친부모가 적지 않다는 얘기다.
어떤 이유에서건 아이들이 부모 밑에서 자랄 수 없게 되면 일반적으로 1차적인 양육과 부양책임이 조부모에게로 넘어간다.
2008년 제정된 연방법에 따라 주정부는 부모의 친권이 박탈된 유아나 아동을 위탁가정에 맡기기에 앞서 이들을 돌보아 줄 친척을 찾아 양육의사를 타진해야 한다. 이 같은 ‘가문의 위기’를 잠재우기 위해 가장 먼저 해결사로 나서는 존재가 바로 ‘역전의 용사’인 조부모다.
갑작스레 부모 역을 맡게 된 조부모는 만만치 않은 도전을 헤쳐 나가야 한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고정수입에 의지해 생활하기 때문에 우선 재정 부담이 만만치 않다. 경기하강으로 노후자금이 졸아든 데다 먹이고 돌보아야 할 식구까지 추가됐으니 더더욱 숨이 찰 수밖에 없다.
아이의 행동문제도 이슈가 될 수 있다. 어린이들은 부모가 함께 하지 않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로 인해 느끼는 감정을 그대로 행동화하는 경향을 보인다.
심리학자들은 이를 ‘외현화 행동문제’라고 부른다. 외현화 행동을 보이는 아이들은 저항감이 심해 다루기 힘들다.
이미 내리막길로 접어든 노부모의 체력은 아이들의 왕성한 행동력을 따라잡기 역부족이다. 젊은 나이에도 키우기 힘든 아이들을 아닌 말로 ‘한물 간’ 나이에 맡았다고 생각해 보라. 그 부담감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노후계획이 와장창 무너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전통적인 조부모의 경험까지 박탈당하게 된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조부모는 손자와 손녀에 대한 1차적인 훈육책임을 면제받는다.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느긋하게 이들의 재롱과 아양을 즐기는 것이 조부모의 ‘특권’이다.
그러나 아이의 부양과 훈육의 책임을 떠맡게 된 입장에서는 반듯하게 키워야 한다는 책임감이 앞서게 마련이고, 그러다보니 자상한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기 보다는 엄격한 ‘부모의 역할’을 수행하는데 주력하게 된다. 조부모의 입장에서건 어린이의 입장에서건 어쩔 수 없이 서로에 대한 ‘재미’가 떨어진다.
아들 혹은 딸이 버린 아이를 키우는 조부모는 우리 역시 ‘실패한 부모’라는 부끄러움과 자의식을 되새기게 된다. 넘어서야 할 ‘내부의 적’을 지닌 셈이다.
다른 가족 구성원들과의 마찰도 어려움을 가중시키는 요인이 될 수 있다. 성인 자녀들은 책임을 다하지 못한 동생에게 부모님이 물심양면의 지원을 제공하는데 불만을 터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부모 노릇 ‘복습’은 엄청난 부담감을 주는 경험이지만 주변의 적절한 지원을 받는다면 벅찬 보람을 맛볼 수 있다. 손녀와 손자의 인생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될 흔치 않는 기회를 잡는다는 게 무엇보다 큰 소득이다.
델라웨어주의 임상심리치료사 주디 피어슨은 “조부모의 부모 노릇은 한 인간의 삶을 모양 짓는 일이며 자칫 나락으로 떨어졌을 아이에게 밝은 미래에 대한 기회를 제공하는 일”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그러나 보람은 제대로 맡은 임무를 해냈을 때에만 느낄 수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주변의 도움이 절실하다.
전문가들은 손자와 손녀 양육과 관련한 우려와 필요를 지원그룹의 구성원들과 공유함으로써 큰 힘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또한 온통 아이에게 파묻혀 지낼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건강을 챙기고 자신만의 시간을 만들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아이를 키우는 일은 한 번 해보았다고 해서 100% 학습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 어찌 해볼 수 없는 확실한 세대 차로 정서적 공감대의 폭까지 제한을 받는 상황에서 사랑으로 무장한 할아버지·할머니의 혼신을 다한 분투는 장렬하다.
전문가 조언
- 자신의 감정을 외면하지 말고 이를 표출할 안전한 방법을 찾아라.
- 자신의 건강을 살피고 매일 혼자만의 시간을 갖도록 한다.
- 배우자와 파트너를 위한 시간을 만들라.
- 변호사와 재정 플래너를 만나 상의하라.
- 손주를 위한 한계와 규칙을 정하고 대인관계의 기술을 가르쳐라.
- 가족과 친구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기존 자원을 최대로 활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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