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국구 스타로 떠올랐던 앤젤라 오 변호사 이민자 터전 유린… 코리안 아메리칸 정체성 탄생
▶ 수습 앞장섰던 전 LA재건위 애니 조 매니저 타커뮤니티와 공존·참여 통해 아메리칸 드림 성취
1992년 4.29 폭동 당시 피해 한인들의 아픔을 대변하고 수습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선 여성들이 있다. 당시 미 주류방송에서 한인사회의 권익을 옹호
하고 대변하는 발언으로 일약 전국적인 스타로 떠올랐던 앤젤라 오 변호사와 LA 재건위원회의 프로젝트 매니저로 발탁되어 피해자들의 복구에 앞
장섰던 애니 조 전 수도전력국 커미셔너에게 폭동의 의미와 교훈 등에 대해 들었다.
-한인사회에 4.29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4.29는 미주 한인들에게 인종관계에 실패했을 때 어떤 비극을 당하게 되는지 뼈저리게 느끼게 해준 역사적 사건이다. 주로 비즈니스를 운영했던 한인 이민자들이 폭동피해의 타겟이 된 것은 분명하다. 미 주류사회는 한인 상인들을 흑인 동네에서 돈만 벌어가고 이익환원을 하지 않는다고 여겼다. 또한 한인들로서는 우리가 남들에게 어떻게
비춰지고 인식되는 지가 얼마나 중요한 지 깨닫게 해주었다. 1992년 4월29일은 LA 한인뿐만 아니라 미 전역의 한인들에게 역사적인 분기점이 되는 날이자 우리가 새로 태어난 날이다. LA 한인사회는 4.29로 미 주류사회는 물론 전 세계에 흩어져 사는 한인들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코리안 아메리칸의 정체의식은 4.29로 비로소 태동되었다.
-2세 한인으로서 폭동 당시 느꼈던 감정은.
▲주류사회에 우리 한인사회의 권익을 옹호하는 것이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했다. 또한 사우스센트럴 LA에서 피땀흘려 쌓아온 한인들의 생활터전이 폭도들의 방화와 약탈로 한줌의 재로 되는 것을 보고 너무 서글펐다. 특히 한인들에 대한 주류사회의 편견에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주류 언론은 한인사회를 무시했고 LA시에 도움을 요청했어도 정치력 부재로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연방정부에 피해보상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가.
▲폭동으로 한인들이 집중적으로 피해를 본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과이지 한인사회가 타켓이 되었다는 증거는 찾을 수가 없기 때문에 소송은 힘들다. 2차 세계대전 때 미국정부에 의해 강제 수용소에 수감된 미국계 일본인들은 후에 보상을 받았는 데 이것은 백악관에서 대통령이 발행한 공식문서가 있어서 가능했다. 이민 초기에 중국계, 일본계, 유대계 커뮤니티가 차별을 당한 것처럼 한인사회도 잘못 된 시간, 잘못된 장소에 있어서 폭동 피해자가 되었다고 본다.
-폭동 당시 한인들을 위해 일한 후 무엇을 느꼈는가.
▲나름대로 그 상황에서 최선을 다했다. 테드 카플이 진행하는 시사 프로그램 ‘나이트라인’에 출연해 한인사회의 억울함을 미 주류사회에 대변했으며 폭동 피해자들의 권익을 대변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사실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는 없었다. 때로는 과도한 칭찬도 받았으며 한편으로는 지나친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다. 한인들이 당장 비즈니스 복구를 하는데 필요한 것이 SBA 융자였다. 처음에 이 정보를 한인사회에 전해주는데 주력했고 그 후에 실무자들이 일을 잘 처리해 피해 한인들이 많은 도움을 받았다.
-4.29 같은 비극을 다시 겪지 않기 위해서는.
▲코리안 아메리칸은 LA 주류사회의 일원으로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정치에 참여하고 주요 단체도 이끌고 있으며 경제활동에도 주력하는 것은 물론 여성, 교계, 커뮤니티 이슈에서도 잘 대처하고 있다. 한인비즈니스 오너들은 이제 고객들에게 친절하게 대하면서 타 커뮤니티가 우리를 어떻게 인식하는지 살펴보는 등 고객 및 커뮤니티 관계도 개선되고 있으며 정부의 규제도 잘 지키고 자신이 커뮤니티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잘 인식하고 있다. 한인사회는 주류사회가 인정해 줄 정도로 다 방면에서 활발하게 성장하고 있다. 우리가 타 커뮤니티 행사에도 열심히 참여하고 한국 문화도 알리면서 교류를 지속하는 것이 중요하다.
-폭동 당시 LA 재건위원회 프로젝트 매니저로 일하면서 느꼈던 점은.
▲폭동이 발생하자 당시 탐 브래들리 시장이 LA 재건위원회를 만들어 피터 위베로스 전 LA 올림픽 커미셔너를 위원장으로 임명했고 위베로스와 올림픽 때 같이 일한 것이 계기가 되어 프로젝트 매니저로 영입되었다. 폭동 발생 후 급조된 조직이라 손발을 맞춰서 일하기 쉽지 않았으며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기도 힘들었다. LA 재건위원회에서 유일한 한인으로 코리안 아메리칸의 권익을 옹호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이 잘 진행되지 않아 상당히 좌절감을 겪었던 기억이 난다.
-폭동 이후 20년이 지난 지금 한인사회와 LA에 많은 변화가 있었는가.
▲한인들은 폭동이 일어난 후 흑인 커뮤니티를 비롯한 타 커뮤니티에 관심을 많이 가지면서 배우려고 했다. 특히 한국의 문화를 알리기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해왔다. 식품상협회 등을 중심으로 흑인 학생들에게 장학금도 주고 리치아웃 하려는 노력을 많이 했다. 흑인 커뮤니티의 지도급 인사들이 상당수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한흑 양커뮤니티는 매년 마틴루터 킹 퍼레이드도 같이 주최하면서 화합을 위해 힘쓰고 있다. LA시는 폭동 20년이 지난 지금 이 순간에도 분명히 더 나은 방향으로 개선되고 있다. 결국 한인사회와 주류사회는 공존하면서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자녀들에게 폭동에 대한 역사교육을 어떻게 시켜야 하는가.
▲한글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은 물론 저녁식사 자리에서도 이야기할 수도 있다. 모든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확한 정보를 주어야한다. 소셜네트웍을 통해 교육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며 다큐멘터리와 관련 서적을 포함한 역사적 유물들을 한곳에 모아놓고 2세나 타 커뮤니티 인사들에게 보여주는 것은 물론 영원히 보관하려는 노력도 중요하다. 또한 서로 피부색이 다른 인종 간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지에 대한 교육을 시켜야 한다. 우리가 과거를 모르면 앞으로 이와 유사한 사태가 닥쳤을 때 적절한 대응을 못한다. 즉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어야 한다.
-앞으로 타 커뮤니티와의 관계를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우리가 먼저 타 커뮤니티와 사귀고 교류해야 한다. 또한 타인종과 동참하는 행사도 늘려야 한다. 매년 열리는 할리웃보울 한국일보 음악대축제도 좋은 예이다. 지난 10년간 비 한인의 참여가 계속 늘어나고 있다. 이제는 미국사회의 젊은 층도 한류에 대해서 잘안다. 여러 커뮤니티가 서로의 문화를 즐기고 이해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인종화합 행사가 되는 것이다. 특히 참여정신이 중요하다. 학부모로서 자녀들의 학교 모임에 영어가 불편하다고 참석하지 않으면 교류를 할 수 없게 된다.
-향후 20년 후 한인사회는 어떻게 변화되어 있을까.
▲한인사회에서 LA 시의원은 물론 LA 시장도 나올 수 있다고 본다. 특히 정치력 신장을 위해서는 한인사회의 인재들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주류 언론에도 많이 진출해 미국의 여론을 우리가 형성할 수 있는 위치까지 가야 한다. 즉 더 큰 꿈을 갖고 넓게 보라는 것이다. 코리안 아메리칸 김용 다트머스 총장이 세계은행 총재로까지 발돋음하지 않는가? 우리는 자녀교육을 위해서 미국에 왔다고 하는 데 아메리칸 드림의 성취를 위해 더 부지런히 뛰어야 한다고 본다. 우리의 자손들이 미국사회 곳곳에서 활동하는 모습을 보면서 폭동은 전화위복의 계기가 됐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글 박흥률·사진 장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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