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주법‘자살 돕는 행위 1년 이상 징역형’ 불구 금전문제 얽히지 않는 한 대부분 기소유예 결정 재판 들어가도 배심원단 ‘사랑의 죄’에 무죄평결
▶ 검사들도 “처벌 골칫거리”
알랜 퍼디(88)는 끝없는 고통에 시달리는 아내 마가렛의 자살을 막지 않았다. 책상 위에 마가렛이 그린 그림이 놓여 있다.
지난 3월20일 응급 구조대원들이 캘리포니아주 샌마르코스에 위치한 알랜 퍼디(88)의 집 안으로 들어섰을 때 마가렛 퍼디(84)는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거실 의자에 앉아 있었다. 계곡이 내려다보이는 대형 유리창으로 한가득 밀려든 아침 햇살로 거실은 환하고 따듯했다. 마가렛은 플래스틱 봉지를 머리에 뒤집어 쓴 채 숨진 상태였다. 질식사였다. 그녀가 남긴 친필 유서는 책상 위에 놓인 폴더에 담겨 있었다. 책상 위쪽의 벽을 따라 설치된 서가는 죽음과 임종의 순간 등을 다룬 책들로 빼곡했다. 그녀의 유서에는“더 이상 고통을 견딜 수 없었다”고 적혀 있었다.
현관에서 구조대원들을 맞아들인 알랜은 아내가 30알의 수면제 정제를 애플소스에 섞어 한꺼번에 삼킨 후 플래스틱 봉지를 머리 위로 뒤집어쓴 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설명했다. 플래스틱 봉지는 목 부분에서 단단히 매듭이 지어져 있었다.
그는 아내가 시신을 UC샌디에고 메디칼 센터에 기증하기로 했다며 장기 적출을 하려면 서둘러야 한다고 재촉했다.
곧이어 현장에 도착한 경관들이 그를 뒤뜰의 패티오로 데려갔다. 알랜은 온 몸을 심하게 떨면서 “빨리 서둘러야 한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그는 경관들에게 마가렛이 자살할 때 그 곁에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아내의 자살을 돕지 않았으나 막지도 않았다고 했다.
앨런은 강력반 형사들에 의해 인근 경찰서로 연행된 뒤 수 시간 만에 살인방조 혐의로 입건돼 비스타 소재 샌디에고 카운티 구치소에 수감됐다.
3월28일 열린 인정신문에서 검찰 측은 그에 대한 케이스를 재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알랜을 형사범으로 기소할 것인지 여부를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알랜과 마가렛은 1977년 결혼했다. 둘 모두 재혼이었다. 알랜의 전 처는 유방암으로, 마가렛의 전 남편은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마가렛은 전 남편이 창업한 회사에서 최고재무책임자(CFO)를 지냈고 2차 세계대전에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했던 알랜은 의료공학 엔지니어로 일하다 은퇴한 후 컨설팅 업무에 종사하고 있었다.
마가렛은 한가할 때마다 풍경화를 그렸고, 알랜과 함께 독서를 하거나 정원을 가꾸기를 즐겼다.
그녀의 건강상태는 그다지 좋지 않았지만 쇼그렌 증후군에 나름대로 잘 대처하고 있었다. 쇼그렌 증후군은 주로 여성에게 발생하는 자가면역 질환으로 치아와 눈은 물론 주요 장기에 심각한 손상을 입히는 만성병이다.
아슬아슬하게 지탱해 오던 마가렛의 건강은 췌장염과 세 개의 척추뼈 골절이 추가되면서 산산이 조각났다.
하루 24시간 끊임없는 통증에 시달렸고, 남편의 도움 없이는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더 이상 화구를 가까이 하지도 못했다.
지난해 12월 알랜이 출장을 떠난 틈을 타서 마가렛은 자살을 시도했다. 그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녀는 정신을 반쯤 잃은 채 차고 안에 쓰러져 있었다. 시동을 걸어둔 혼자 승용차의 배기개스를 들이마셔 일산화탄소 중독을 일으킨 상태였다.
알랜의 응급처치로 뜻을 이루지 못한 그녀는 지난 2월 그녀의 친자녀 다섯 명을 한자리에 불러 모았다. 어머니의 갑작스런 부름에 영국에 거주하는 딸까지 날아왔다. 그녀는 이것이 어머니와의 마지막 대면임을 직감했다고 회고했다.
마가렛은 자녀들에게 “의사가 처방해준 약이 듣지 않는다. 이젠 더 이상 통증을 견뎌낼 재간이 없다”고 말했다. 사실상 자살을 선택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셈이다.
검사들에게 자살방조 케이스는 처치 곤란한 골칫거리다. 법으로 다스리기에도 뭣하지만 그렇다고 불기소 처분을 내리기도 께름칙하다.
다음번 유사사건 발생 시 대처하기가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예컨대 용의자가 치료 가능한 질환에 걸린 환자의 자살을 도왔다거나, 환자의 사망으로 금전적 이익을 누리게 된 경우 당연히 형사소추를 해야 하지만 이전의 유사 케이스에 대한 기소유예 결정으로 검찰의 운신 폭이 좁아질 수 있다.
이보다 더 실질적인 문제는 용의자를 기소했다 하더라도 재판과정에서 배심원단을 설득해 유죄평결을 끌어내기가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이다.
캘리포니아 웨스턴 법대의 ‘무죄 프로젝트’ 디렉터이자 형사법 전문 변호사인 저스틴 브룩스는 안락사와 관련한 재판에서 배심원단은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을 끝내는데 도움”을 준 피고에게 무죄평결을 내리는 경향을 보인다고 말했다.
알랜의 변호사인 허버트 웨슨은 사건을 담당한 지방검사가 사랑하는 아내의 자살을 방조할 수밖에 없었던 의뢰인의 정상을 참작해 주기를 희망했다.
현재 전국 50개 주 가운데 오리건과 몬태나, 워싱턴 등 3개 주는 의료인의 조력을 받는 자살을 법으로 허용한다. 반면 캘리포니아에서 자살을 돕는 행위는 최소한 1년 이상의 징역형으로 다스리는 중범에 해당한다. 하지만 실제로 이 법이 집행되는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자살방조를 막기 위한 겁주기 엄포용에 가깝다.
지난 2009년 심각한 뇌졸중을 일으킨 남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을 있도록 도와준 한 여성은 사회봉사형이라는 솜방망이 처벌을 받았다.
지방 검사뿐 아니라 연방 검사도 불치병 환자의 자살을 방조하는 행위에 관대하다.
최근 연방 검찰은 자살도구 키트(suicide kit)를 우편 판매해온 샌디에고 카운티 엘카혼의 92세 노파에게 자살방조 혐의가 아닌 탈세혐의를 적용했다. 자살도구 판매 수입을 신고하지 않았다는 다소 엉뚱한 죄목을 갖다 붙인 것이다.
판사도 장단을 맞추었다. 지난주 연방 판사는 용의자의 자살도구 판매 중지를 조건으로 보호관찰형을 구형키로 한 검찰 측의 형량거래를 인정했다.
이에 앞서 1999년 샌디에고 카운티에서는 퇴역 해군장교인 토머스 메이가 루게릭병으로 전신이 마비된 채 죽어가던 아내 헤이젤을 안락사 시킨 사건이 터졌다.
메이는 밀폐된 자신의 차고에서 승용차의 시동을 걸어놓은 채 아내와 동반자살을 시도했다. 헤이젤은 그의 품에 안겨 숨졌으나 메이는 동네 사람들에 의해 발견돼 죽음의 문턱에서 회생했다.
당시 이 사건의 수사를 지휘했던 샌디에고 경찰국의 수 패싱은 “법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메이를 체포할 수밖에 없었지만, 같은 입장이었다면 나 역시 그와 동일한 선택을 했을 것”이라고 털어놓았다. 메이는 재판을 앞두고 수면제를 이용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한편 알랜은 경찰에 체포된 후 아내를 다시 볼 수 없었다. 그가 귀가했을 때 아내의 시신은 이미 검시소로 옮겨진 후였다. 장기를 기증하겠다는 마가렛의 유언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알랜은 아직까지 기소여부가 결정되지 않은 상태다.
그는 아내의 시신을 화장했다. 마가렛의 추모식이 끝난 후 알랜은 마가렛의 친 자녀들에게 분골함을 넘겨주고 재를 바다에 뿌려달라고 부탁했다. 알랜은 “이제 내겐 아무런 기력도 남아 있지 않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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