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 잡화상
▶ 장 소 현 <극작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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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써놓고 보니, 무슨 옛날 간첩들 난수표 숫자 같아서 야릇한 느낌이 든다. 그러나 조금만 자세히 보면 이 숫자들이 우리 현대사의 큰 고비를 이룬 사건을 말하는 것임을 누구나 금방 알아차릴 것이다. 3.1절, 8.15 광복절…
별 생각 없이 이런 말을 써오면서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참 얄궂은 일이다. 우리는 언제부터 역사적인 날들을 무표정한 숫자로 표기하기 시작했을까? 왜일까? 우리가 특별히 숫자에 강한 민족도 아닌데… 혹시 서양식을 흉내 낸 건가? 미국에서도 숫자로 표시하는 기념일은 7월4일이나 9.11 정도인데…
아마도 중요한 사건이 일어난 날짜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세월이 지난 후에도 그 날의 뜻을 되살리자는 깊은 뜻이 담겨 있을 수도 있다. 하긴 이런 식으로 따지고 보면 우리 역사 속에는 그렇게 표시된 사건이 상당히 많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병인양요, 신미양요, 을미사변, 갑신정변, 을사조약… 등등.
그러나 중요한 것은 연대나 날짜가 아니라 그 안에 숨겨져 있는 역사적인 의미와 인간의 드라마일 것이다. 그런 드라마를 숫자만으로는 충분히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한국 역사를 잘 모르는 우리 2세들이나 외국 사람에게 6.25나 4.19는 전화 에리어 코드 정도로 읽힐지도 모를 일이고, 몇십 년이 지난 뒤 후손들이 6.25가 뭐냐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묻는다면 설명을 하기에 진땀을 빼야 할 것이다. 참 답답해진다.
김신웅 시인은 그런 안타까움을 이렇게 노래했다.
“3.1은 3이요 답하는 손주에게/ 8.15는 하고 물으니/ 머뭇거리던 대답, 120이라 한다/ 그래서 가까웠던 일/ 4.29라 들은 일 있나 했더니/ 역시 숫자로 116인데…/ 의아한 눈초리만 보내온다/ 6.25는 물을 엄두도 못내는/ 별안간 스쳐가는 그 날의 기억…” (‘총알 박힌 노송은 그대로인데’의 첫 연)
이처럼 피눈물 나는 사연들을 개성 없는 숫자로 표시하고 이해하는 것은 어떤 까닭일까? 숫자에는 표정이 없다. 차갑고 객관적인 기호일 따름이다. 숫자란 연극성이 거의 배제된 냉정한 관념으로, 사람 냄새 물씬한 역사적 사건들을 표시하기에는 영 마땅치가 않다. 예를 들어 죄수들은 이름이 아니라 숫자로 불리게 되는데, 이로 인해서 개성적인 인간성을 빼앗기는 셈이다. 군번이나 학번 같은 숫자도 이와 비슷한 역할을 할 때가 많다.
혹시는 이런 식의 표기가 DJ JP YS MB… 같은 얄궂은 발상과 같은 맥락은 아닌지 하는 의문이 든다. 그렇다면 문제다. 우리 자녀들의 역사 교육을 위해서라도 바로잡아야 한다. 역사의 정신은 후손들에게 이야기되고 전해져야 한다. 우리말을 2세들에게 가르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 일 것이다. 역사 또한 마찬가지다. 역사적인 사건 뒤에는 뻐근한 시대정신이 배어 있게 마련이다. 그걸 가르쳐야 한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식으로 역사를 무표정하게 객관화시키는 경향이 예술작품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사이구’라는 낱말처럼…
혹시 누가 “6.25가 어느 동네 에리어 코드냐?”고 물어오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38선이 슬프게 아른거린다. 그러고 보니 38선이라는 낱말도 문제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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