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탈북자 한명 한명이 제겐 다 귀한 꽃이죠”
탈북인들이 뉴욕에 도착한다는 전화가 오면 한밤중이라도 케네디 공항으로 달려가 “참 잘왔다. 잘 왔어”하고 등을 어루만져주는 김영란씨, 방과 직장을 구해주고 반찬을 만들어주는 그에게 탈북인들은 ‘어머니’ 라 부른다.
뉴욕에 처음 발을 딛는 탈북인의 손을 잡고 뉴욕생활을 인도하는 김영란 두리하나USA((탈북난민 정착돕기 선교회) 대표를 만난 날, 그는 말했다.“여름방학동안 타주에 있다가 직장을 찾으러 다들 뉴욕에 올라와 있다. 그중 한아이가 아파서 미역국을 끓여서 가져다주고 왔다”는 그는 뉴저지, 뉴왁, 메릴랜드 등에 흩어져 사는 북한난민의 동정을 훤히 꿰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존 에프 케네디 공항에 도착한 순간부터 그의 도움으로 미국에 정착한다.
방을 얻어 몇 명이 함께 살면서 네일가게, 미용실, 세탁소, 컴퓨터업소, 디자인업소 등에서 일하는데 그중에는 공부하는 학생도 있다. “한국의 두리하나를 통해 오기도 하지만 다른 외국기관이나 한국 영사관에서 전화가 온다. 몇날 몇시에 공항에 도착한다는 전화를 받으면 한밤중에도 달려간다. 그렇게 온 식구들이 수십 명이 되었다”그는 일주일에 세 번 새벽 도매상에 가서 꽃을 받아와 오전에는 가게에서 일하고 오후에는 가게를 제자에게 맡긴 후 일자리를 찾으러 다니고 장을 봐서 김치와 반찬을 만들어 탈북인들을 돕고 있다.
“요즘은 불경기라 직장 구하기가 힘들다. 기도를 하던 중 북한 실향민이 하는 가게를 찾아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그 결과 대부분 취직이 되었다.”
그의 보살핌을 받은 이들은 어머니날 편지를 보내온다.
“모든 것이 낯설어 두리번거리는 저를 따뜻한 품에 안아주며 하나님이 이곳까지 너를 인도하여 주셨으니 모든 근심걱정은 다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만 하면 된다. 아무 것도 걱정하지 마라며 넉넉한 미소를 지으실 때 마음의 두려움이 사라졌다”고 딸 민들레는 편지에 썼다. 그가 그 여성의 이름을 꽃 이름을 따서 민들레라 지어주었다.
두리하나(대표 천기원 목사, 고문 김진홍 목사)는 1999년 한국에서 설립된 초교파 복음주의 선교단체로 북한동포에게 기독교 복음을 전파하고 그들을 구제하는데 목적이 있다. 2005년에는 두리하나 USA가 설립되었고 2006년부터 이 기관을 통해 북한 난민들이 합법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일단 미국으로 들어온 후 임시영주권과 사회보장번호, 의료보험 혜택을 받으나 한국정부와 달리 정착금 보조가 없기 때문에 몇 달간 여러모로 어려움을 겪는다. 영어를 배워야 하고 주거비와 생활을 위해 일을 해야 한다.
“오랜 불경기로 도움의 손길이 끊어져도 김윤호 뉴욕예술가곡연구회 이사장, 서병선 회장은 큰힘이 되어준다. 특히 탈북난민돕기모금음악회 기금은 두리하나USA워싱턴 본부 조영진 목사를 통해 100% 중국에서 북한난민 구출에 쓰이고 있다. 그외 10여 분이 꾸준히 도와주고 꽃가게 수익금 모두 탈북난민선교회 정착자금으로 쓴다. 모자랄 때는 우리집 생활비에서 조금씩 떼어 쓰는데 고기 대신 콩나물, 두부, 양배추 등을 이용하여 맛깔스런 식탁을 내놓으니 식구들은 잘 모른다.”
싱긋 웃으면서 운영 상태를 말하는 김영란 대표는 그 역시 간증집회를 하고 2012 시화 탁상용 달력 제작, 5월에는 ‘김영란의 꽃 이야기’ 시화전(그림 김주상) 등을 열어 기금을 한푼이라도 보태고 있다.
▲왜 그들을 돕게 되었나
누구보다 열심히 이민생활을 개척하며 딸 넷을 정서적으로 풍부하게 키우려 애쓰던 김영란은 어떤 동기로 따스한 동포 사랑을 실천하게 되었을까?
그는 1964년 숙명여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결혼 10년만인 1974년 미국으로 이민 와 자메이카에서 서양그로서리, 그린 포인트에서 야채가게를 경영했고 브로드웨이에서 오빠네와 함께 오랜 기간 가방공장과 가게를 운영했다.
1978년 한국일보 제1회 수기모집에 ‘라일락 향기 가득한 뜨락에서’가 당선되었고 1998년 이 제목으로 책을 내기도 했다. 새벽에 온식구의 도시락을 사주고 아이들을 키우며 무쇠처럼 강인한 생활력으로 살아온 그지만 힘들 때가 있었다.
“식구들을 모두 다 보내놓고 샤워 물 틀어놓고 ‘어머니’ 부르며 한참씩 소리쳐 울다보면 속이 다 풀려 가벼운 마음으로 다시 가게로 뛰어갔다”
그러다가 남에게 속고 엄청난 손해를 보는 등 시련이 연속되었고 결국 가게를 연 지 15년만인 1993년 문을 닫았다. 문제는 건강이었다. 1994년 사기 사건의 충격으로 뒤로 넘어지면서 시작된 얼굴의 마비가 점점 아래로 내려가며 손발이 마비되었다.
“마비되어 가는 심장과 육신을 정상으로 돌려주면 불행한 이들을 기꺼이 돕겠다고 하나님과 약속했다. 그이후 완치되는 황홀한 체험을 했다” 딸들도 “이번에 우리 엄마만 살려주면 하나님을 위한 일만 하시게 약속드리겠다”고 울며 기도했다고 한다.
하나님께 서원 기도하면서 고침을 받은 후 어머니의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이 되라’는 간곡한 말씀에 남은 생을 하나님께 바치기로 한 것이다.
▲탈북난민센터 설립이 꿈
김영란은 북한에서 순교한 아버지와 중국에 조선족 교회를 29개 개척 설립한 어머니 홍병숙(98, 뉴욕거주)권사의 3남 1녀 중 세번째로 1945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1.4후퇴당시 충남 공주로 피난 나왔는데 어머니는 6.25 전쟁시 혼자 되어 사남매를 키우면서 호주, 뉴욕, 워싱턴DC, 중국, 뉴질랜드를 오가며 전도생활을 해온 분이다.
“굴곡많은 삶이지만 나를 사랑하는 많은 분들이 있어 한번도 좌절하지 않았다. 지금도 플러싱 거리에서 만나면 반갑게 인사하고 3~4대를 이은 손님들이 관혼상제 꽃을 주문한다. 어려서부터 꽃을 좋아했고 꽃 때문에 많이 행복했다. 꽃으로 인해 남녀노소가 모두 친구가 되니 뉴욕에서 가장 행복한 여인이 아닌가 싶다”고 말한다.
지난 20~30년동안 한인사회에 무연고자가 사망했을 때 목사나 한인회로부터 연락을 받으면 늘 무료로 화사한 꽃다발을 만들어 마지막 가는 길이 쓸쓸하지 않게 한 것도 그의 몫이었다.
한평생 꽃과 함께한 뛰어난 솜씨는 생활수단도 되었다. 플러싱 김영란 꽃집은 각종 행사꽃을 취급하며 그의 3녀와 4녀가 현재 어머니를 이어 꽃 관련사업을 하고 있다. 장녀는 NYU대학원을 나와 플러싱 하스피탈 소셜워커, 차녀는 프랑스에서 소르본느 대학원을 나와 파리시내의 초등학교 교사이다. 슬하에 손녀3, 손자 1명을 두었다.
11월이면 결혼생활 45년 되는 남편은 남들은 다 칭찬하는 요리연구가인 아내에게 단 한번도 반찬이 맛있다고 한 적 없는 전형적인 한국 양반이지만 그래도 김영란의 선교활동을 이해한다. 그는 두리하나 USA 뉴욕 대표 외에도 많은 일을 하고 있다. 꽃꽂이 강사, 기독교 방송프로그램 진행자, 시인·수필가, 하나같이 수십년의 경력을 지녔다. 수십년이 지나도 한결같은 사람 김영란, 그의 탈북인 선교사역도 영원히 계속 될 것으로 보인다.
“남은 생은 탈북난민들이 잘 정착할 수 있는 센터 건립을 위해 애쓰겠다. 장차 꽃가게는 제자에게 물려주고 탈북자들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들을 책으로 묶어내 많은 이들의 관심이, 사랑이 모이기 기대한다. 또 98세 친정어머니가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나의 사역에 기도해 주시길 바란다.” 그의 뜨거운 바램이다.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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