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시대에 필요한 크리스천 리더 양성 꿈”
크리스천 아카데미 기숙사 앞에 선 신정하.
선진된 미국에서 공부를 더 하고 돌아가 대한민국 최고의 상법 교수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뉴욕땅을 밟았던 그는 40년이 지난 지금 미국에 정착해 영재학교를 운영하는 교육자로서 제2의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고있다. 그 밑바탕에는 자신이 가꾸어 온 기독교 신앙이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있다.
누에고치 비슷하게 생긴 뉴저지의 허리쯤에 해당되는 중부뉴저지 크림리지에 지난 2004년 재탄생한 뉴저지 유나이티드 크리스천 아카데미가 내년 9월이면 설립 10년을 맞는다. 현재 학생수 100명이 겨우 넘는 미니 스쿨이지만 갖출 것은 두루 갖춘 특수 사립 고등학교이다. 매일 집에서 통학하는 로칼 학생이 60여명, 기숙사 생활을 하는 학생 42명으로 구분된다. 미국식 학제 8학년부터 12학년까지니까 그리 작지도 않은 아담한 규모의 학교이다. 미국의 일반 고등학교와 교과과정은 똑같지만 기독교 학교로서의 특수성을 지닌 영재 교육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적은 인원이지만 이 시대에 필요한 크리스천 리더들을 양성해 그들이 세상에 나아가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수 있도록 기독교 정신을 가르치는 학교입니다. 청소년들의 탈렌트와 능력을 개발하면서 현재로선 꼭 아이비리그를 지향하지는 않더라도 학교생활에서 행복지수를 느낄수 있도록 지도하고 있습니다.”
신정하 재단이사장은 학교의 교훈도 그에 걸맞는 슬로건으로 정했다. 지성, 감성 그리고 영성을 겸비한 크리스천 리더로서 사회에 공헌하는 인재를 양성한다는 내용이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교사들의 지도로 학생들은 매일 큐티와 묵상을 하고 방학중에는 유럽과 남미 등지로 선교여행을 떠난다. 그가 학교 운영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초였다. 열정을 기울여 키워가던 크리스천 아카데미 수양관이 어느 정도 모습을 갖추던 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무언가 허전함을 느끼던 차 잘못 배달된 우편물로 인해 부근에 유나이티드 크리스천 아카데미라는 정규 사립학교가 존재하는 것을 알았다. 메일 전달 과정에서 확인한 것은 몇몇 미국인 기독교사들이 뜻을 모아 설립한 1년차의 작은 학교지만 그들의 교육목표와 철학은 분명했다. 뉴저지 주정부에 등록된 정규 사립학교지만 교실과 학습장비 등이 부족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막연하나마 학교교육에 관심을 두고 있던 자신이 왜 건물을 증축하는데 그토록 열심이었던지? 하늘이 준 기회로 삼고 그는 학교측과 지속적인 교섭을 벌인 끝에 자신의 건물을 학교의 교실과 세미나실, 기숙사로 활용키로 결정했다, 결국은 교육방식과 커리큘럼도 넘어오면서 2004년 9월 그는 미국 사립 고등학교의 설립자가 되었다. 두 아카데미의 이름을 합쳐 뉴저지 유나이티드 크리스천 아카데미의 이사장으로 취임하면서 그는 한인 이민사에 새로운 역사를 쓴 인물이 되었다. 분명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었다.
아카데미 설립 10주년이 되는 내년 9월 학기에는 전교생 160명 규모로 확장되었으면 하는게 그의 바램이다. 로칼 100명, 기숙학생 60명 정도로 커지면 학교 재정도 독립적으로 운영할수 있고 기숙사도 관리하기 좋은 규모가 되기 때문이다. 현재 추세라면 한국과 중국쪽에서 오는 기숙학생들이 늘어나고 있어 인터내셔널 기숙학교라는 또다른 별칭이 추가될듯도 싶다. 지난 학기 새로 부임한 로버트 펍칙 교장과 한 약속도 있고 7년전부터 매년 5만달러씩 장학금을 책임져 주고있는 후원회(Friends of NJUC)가 있어 든든하다. 그와같은 여건 속에 좋은 학교 만드는 일에 남은 인생을 헌신하기로 일찌감치 마음먹은 신정하이다.
한국서 연세대 정법대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한양대 교수로서 강단에 서던 그에게 미국과의 인연이 닿은 것은 한양대 김연준 총장이 정부로부터 해운공사를 인수하면서부터였다. 인수팀에 합류했던 그는 주요한 사장 밑에서 총무이사로 잠시 지내다가 동경지점 1년반 근무를 성공적으로 마쳤다는 공로로 1971년 9월 뉴욕지사장에 임명됐다. 부임하면서 뉴욕에서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올 것 같은 예감이 들었지만 이내 잘못된 계산이었음을 알게 된다. 때마침 박정희 대통령의 수출 드라이브가 한창 진행되던 시기였으므로 그는 대미수출의 전진기지인 뉴욕에 운송 담당 수출역군으로 상륙한 셈이었다.
당시 뉴욕에서는 무역협회 김옥 지사장과 윤석만 코트라 지사장의 독려 속에 외환은행 뉴욕지점과 삼성, 대우, 효성 등 10여개 수출기업 지사들이 참석하는 수출진흥회의가 자주 열리던 시기였다. 해운공사의 역할은 한국에서 오는 수출 선편이 차질없이 운행되는가의 여부였다. 그때만 해도 컨테이너선이 출현하기 이전이었으므로 재래선에 의해 한달에 한번꼴로 뉴욕항에 입항하는 해운공사의 화물 전용선에는 수출 주종품이던 한국산 가발과 섬유, 타이어 제품들이 주로 실렸고 75년 켄테이너선의 도입으로 선적물량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맨하탄 다운타운 월스트릿 근처 77 브로드웨이 메릴린치 빌딩에 세들어 있던 해운공사 뉴욕지사장의 역할은 행정 관리 외에 거래선 확보에도 직접 나서는 것이었다. 미국의 큰 회사 사장들과 골프를 치면서 “우리 컨테이너선 좀 이용해 달라”고 세일즈도 하고 프리젠테이션도 했다. 배가 돌아갈 때에는 미제 전자제품, 완성품들이 실려가다가 79년말경부터는 집채만한 크기의 컴퓨터들이 컨테이너에 실려갔다. 그러다가 70년대 말 80년대 초 중동건설 붐에 편승해 목재, 철재 등 건설자재가 아라비아 반도쪽으로 엄청나게 실려갔다.
“어렵고 힘들었지만 그렇게 빠른 시일내에 발전하는 조국을 보면서 우리들이 이런데서 조금씩 역할 을 했던 것이 밑바탕이 되어 수출산업을 일구었다는 보람을 느꼈습니다. 당시 주재원들은 샐러리맨 일을 하고 있었지만 결과에 대해서는 자부심들을 갖고 있었죠. 당시는 재래선도 만들지 못하던 시절이었으나 지금은 배를 지어서 수출하는 조선왕국이 된데 대해 뿌듯함을 느낍니다.”
주재원 생활 10년을 하다보니 아이들도 크고, 한국으로 돌아가 적응하기가 어렵다는 판단이 섰다. 그때만 해도 한국이 정치적으로 불안정했고 북한의 위협이 증대되던 때였다. 소유주가 달라진 해운공사를 사직하고 뉴저지에서 개인 비즈니스로 전환했다. 운송회사 유니포트를 차려 2-3년 운영하다가 남에게 넘기고 리틀페리에 있던 창고를 매각해 88년 그 자금으로 중부 뉴저지에 크리스천 아카데미를 세웠다.
소아과 의사인 부인 안전식과 슬하에 두 아들을 두었던 그는 장래가 기대되던 장남 조셉이 스페인 여행 중 바르셀로나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극도의 충격을 받았으나 신앙의 힘으로 극복하면서 크리스천 아카데미 사업에 한동안 몰두했다. 지금은 그토록 원했던 학교, 뉴저지 유나이티드 크리스천 아카데미에 올인하고 있는 그를 컬럼비아대에서 정치학을 전공한 차남 새무엘과 개업의로 활동중인 부인이 열심히 돕고 있다. 조종무<뉴저지 고문/ 국사편찬위 해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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