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인사회에 뜻있는 유산 물려주고 싶어 장학재단 설립”
85년 9월 뉴욕을 방문한 김영삼 민추협의장에게 브로드웨이 한인상가를 안내하는 조병창 경제인협회장(오른쪽).
뉴욕.뉴저지 한인회 통행 매년 15,000달러씩 장학금 지급
한인회장 시절 복지재단 신설 어려운 동포돕기.불체가족 상봉 등 성사
은퇴후에도 민족화해협력 범뉴욕협의회 대표상임의장 등 활발한 활동
1970대에 이민 온 한인 1세대 가운데 성공적으로 정착을 이룬 가정들이 많다. 그들의 대부분은 이제 현직에서 은퇴를 했고, 자녀들은 모두 결혼해서 제 앞가림들은 하고 있다. 노년에 접어든 그들은 손자 손녀들이 커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건강을 유지하는 것이 최대의 낙이다. 경제적인 기반을 이루었기 때문에 여생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형편이지만 무엇인가 한인사회를 위해 다하지 못한 허전함 같은 것이 느껴지는 사람들도 있다.
지금까지 이룬 것에 대한 사회 환원 차원에서 무언가 뜻있는 일을 남겨놓고 싶은 욕망을 가진 이들도 상당수 있다. 그들 가운데 개인 재산으로 장학재단을 설립해 한인사회에 유산으로 헌납하는 용기 있는 독지가들도 더러 있다. 뉴욕일원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만큼 흔하진 않지만 그 용기 있는 사람들 가운데 조병창도 한사람이다. 그는 제18대 뉴욕한인회장(1986-88)을 역임한, 잘 알려진 한인사회 봉사자 중의 한사람이다. 지난 2007년 조 화운데이션을 설립한 그는 이듬해부터 6년째 뉴욕한인회와 뉴저지한인회를 통해 매년 1만5,000달러의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한국 쪽에 보내는 기존 장학금 송금까지 합치면 매년 2만 달러 정도가 장학금으로 지출되도록 재단을 구성해 놓았다.
직계가족 중심의 조 화운데이션은 조병창 본인이 기본적인 부담을 하고 아들, 딸 둘, 사위들이 함께 참여하는 모양새를 갖추었다. 이를 통해 2세, 3세들에게 한국인이라는 아이덴티티를 심어주고, 나누며 살아가는 정신을 기르자는 그의 바램이 장학재단 설립의 첫 번째 동기였다.
두 번째는 그가 어린 시절 가난한 가운데 공부하면서 불우한 어린이들에 대해 특별한 관심이 기울여왔고 그와 같은 장학의 뿌리는 지난 81년 고향 초등학교 후배들에게 장학금을 주기 위해 설립한 도곡장학회에서 비롯됐다. 그 연장선상에서 80년대 초중반에 걸쳐 뉴욕에서 한국 심장병 어린이 돕기재단 후원회장을 10여년 맡은 적이 있다. 세 번째로 동포사회에 대한 메시지는 자신과 같이 사회 환원 의지가 있는 독지가들에게 모티브를 주고 싶은 뜻에서 장학재단을 설립한 것이다. “어떤 선량한 일이나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고 싶은 의사는 누구나 다 갖고 있습니다.
여건이 따르지 않을 뿐이지, 기본적으로 그런 마음은 다 갖고 있다고 봅니다. 다만 여건은 충족됐는데 눈치를 보면서 머뭇거리는 분들에게 멍석을 깔아주고 싶은 마음에서 한발작 먼저 내디딘 것에 불과합니다. 장학재단은 가족회의를 통해 설립했습니다.”그가 장학금을 뉴욕, 뉴저지 한인회를 통해 지급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자신이 한때 봉사활동을 펼치던 장이 한인회였고 그 한인회를 언젠가는 1,5세, 2세들에게 넘겨주어야 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관심을 불어 넣어주기 위한 하나의 동기부여 측면에서 그런 결정을 한 것이다. 장학금 신청 시 필수적으로 제출하는 에세이 제목도 한인회, 한인사회라고 못을 박아 이 분야에 대한 공부를 하도록 배려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한인회에 대한 그의 남다른 애정표현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뉴욕한인사회에서 그의 전성기는 80년대 초반에 펼쳐졌다.
뉴욕 브로드웨이 상가에서 주얼리 도매상으로 도약을 이룬 83년 서울올림픽 뉴욕후원회 이사장을 맡으면서 단체활동을 시작했고 85년 경제인협회장에 선출되면서 최초로 구매사절단 63명을 이끌고 한국을 방문, 1억 달러 이상의 국산품 구매실적을 올렸다. 이후로 뉴욕한인회에 의욕적으로 참여, 이사장에 이어 제18대 한인회장에 선출됨으로서 브로드웨이 한인상가가 배출한 최초의 뉴욕한인회장이 되었다.
뉴욕한인회장 시절 그는 역점사업으로 복지재단을 신설하여 정착과정에서 어려움을 겪는 동포들을 돕는 여러 가지 봉사활동을 펼쳤다. 임기 중 복지기금 20만 달러를 모금하여 암에 쓰러진 무연고자, 불의에 희생된 상인이나 종업원의 가족들을 도왔으며, 특히 불법체류 사면 대상자들의 직계가족 상봉 작업도 이를 통해 성사시켰다. 또한 한인회 사무국의 전산화도 이때 이룩했다. 퇴임 후 89년에는 분쟁으로 얼룩진 미주한인총연합회 이사장으로 선출되어 회장 권한 대행으로서 이를 정상화시켜 후임자에게 넘겨준 일도 있었다. 이후로 서울 나들이가 잦아졌다. 민족통일 미동부협의회 회장을 거쳐 2005년에는 신설된 민주평통 북미주 부의장을 연임하고 나서 은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은퇴라는 말은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듯, 현재도 민족화해협력 범뉴욕협의회 대표 상임의장을 맡고 있으면서 뉴욕한인회 역대회장으로서 한인사회 현안에 대한 부단한 조언 활동을 하고 있다. 그에게는 남다른 DNA가 있는지 모른다. 어릴 적부터 부모를 공경하는 마음, 고향과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했다. 그 정서가 발전해 이제는 남북 간 민간차원의 교류가 활발해지고 그로인해 각 분야별로 민족 동질성을 회복하는 일이 하루속히 이뤄졌으면 하는 것이 바램이 간절하다.
또 그 일에 힘을 보태고 싶은 욕망도 식지 않고 있다. 국민훈장을 2회(목련장 노태우, 동백장 이명박) 수상한 상복을 누렸지만, 그보다도 한국에서 하급 공무원 시절 국제 펜클럽 서울대회를 성공적으로 마친 공로로 받았던 1969년의 우수공무원 표창(문화공보부 장관 신범식)이 그에게는 아스라한 추억 속의 영광으로 남아있다. 이 해의 펜클럽 대회는 시인 모윤숙이 주도했고 뉴욕에서 필명을 날리던 ‘초당’의 작가 강용흘이 마지막으로 참석했던 대회라서 더욱 뜻 깊었다.
부인(이인자)과 함께 30년 넘게 운영하던 비즈니스, 영타운 코포레이션은 2008년 아들 영환에게 물려주었으며, 교사 출신의 큰딸 프랜시스는 결혼해 주부가 되었고, 둘째딸 모니카는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이다. 이번 주말인 11일 조병창은 성공한 이민자들에게 주는 영예의 엘리스 아일랜드상을 받는다.
조종무<뉴저지 고문/ 국사편찬위 해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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