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년 지역봉사활동. 뚝심 믿고 정치 1번지 노크”
지난 5월14일 1차 투표에서 승리를 거둔 윤후보가 캠페인 멤버들 앞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82년 정착이후 부시장.지역 경협회장 등 역임 ‘저지시티 토박이’
지난해 필립권 판사후보 낙마보며 1세로서 정치적 기반마련 필요성 절감
6월11일 결선 투표 앞두고 한인사회 응집력 보여주고파
한인 유권자가 6명에 불과한 백인지역 선거에서 총 2천여 표를 얻어 1위를 차지한 윤여태의 뚝심은 대단하다. 그것도 무소속으로 현직 주 하원의원을 5백여 표 차이로 따돌리고서 말이다. 과반득표에는 못 미쳐 6월11일 결선투표를 남겨놓고 있지만 3위를 한 히스패닉계 후보가 지지를 표명했고, 유력지 저지저널의 공식 지지선언을 이끌어냈기 때문에 유리한 입장에 서 있는 것은 분명하다. 다만 결선투표에서 맞붙는 상대가 강적이니만치 결코 방심해선 안 된다는 후보 자신의 각오처럼 만만치 않은 게임을 앞두고 있다. 그러나 윤후보는 자신감에 넘쳐있다.
■ 30여년 저지시티 토박이
그가 시의원에 출마한 저지시티는 뉴저지 제2의 도시이다. 규모면에서 뉴어크에 밀리고는 있지만 2000년을 계기로 뉴포트 지역 재개발사업의 성공과 9.11사태 이후 탈 맨하탄 바람으로 강 건너 이곳에 자리 잡은 체이스 맨하탄 은행, 골드만삭스, 리먼 브라더스, 메릴린치, 찰스 스왑 등이 들어서는 바람에 명실상부한 제2의 금융도시로 자리 잡았다. 그와 같은 경제적 발전에 못지않게 저지시티는 뉴저지의 정치인 육군사관학교라고 할 만큼 정치의식 또한 높은 지역이다. 특히 윤여태가 출마한 D지역구(저지시티 하이츠)는 뉴저지 정치의 1번지라는 별명이 붙은 곳이다.
현역 시장도 그곳에 살고 있고, 카운티 이그재큐티브도 그곳이 거주지다. 저지시티에서 역사상 가장 많은 현직 시의원도 이 지역에 살고 있다. 그래서 정치의 본산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주민은 거의가 아이리시, 이태리계, 독일계 등 백인계이다. 이번에 선거운동을 벌이면서 윤후보 측은 ‘30년 이상 하이츠를 위해 투쟁하고 있는 마이클 윤(Fighting for the Heights for over 30 years)’을 표방하고 있다. 또 다른 포스터에는 ‘30년의 커뮤니티 봉사 경력이 증명하는 후보(30 years proven community service record)’를 내세우고 있다. 그만큼 윤여태는 자신의 비즈니스 지역사회를 위해 오랫동안 공을 들여왔다.
1982년 센트럴 애비뉴 선상에 있는 스테이셔너리를 오픈하고 들어오면서 그는 지역 봉사단체인 라이온즈클럽에 가입했다. 그때부터 사회참여를 했기 때문에 한인이지만 토박이 행세를 할만도 하다. 한인사회 보다는 지역사회 봉사에 우선순위를 두었다. 브렛 션들러 저지시티 시장 당시 부시장으로 9년 세월을 봉사했고 3천명 회원을 거느린 저지시티 경제인연합회장, 센트럴 애비뉴 특별경제개발위원회 회장겸 이사장, 저지시티 하이츠 주민연합회 공동회장, 저지시티 에브리씽 페스티벌위원회장, 저지시티 세이브 크라이스트 하스피털 위원회장, 허드슨카운티 한국전 참전용사회 후원기금 모금위원장 등으로 활동하면서 지역 인사들과 교류를 해왔다.
또한 이제까지 저지시티 경제개발위원, 저지시티 경제개발공사 상임위원, 흑인지역 지도자들을 연합한 저지시티 한흑연대 위원회장, 미 유색인종을 위한 연합회 이사, 세인트 피터스 플렙고교, 허드슨 커뮤니티 칼리지 이사 등을 역임했다. 그러는 동안 시의원에 도전할 기회를 찾지 못하다가 늦었지만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 출마의 직접적인 동기는 지난해 크리스 크리스티 주지사가 추천한 한국계 2세 필립권 대법원 판사 후보가 주의회의 인준을 받지 못하고 실패한데서 비롯됐다.
“필립권이 문턱에서 낙마하는 것을 목격하면서 우리 이민 개척 1세가 미국에서 경제적으로 성취한 것 못지않게 정치적으로 할 역할이 있더라고요, 늦게나마 필립권 사건을 보면서 이래서는 안 되겠다. 내가 이제 밥 세끼 먹게 됐으니 개척 1세로서 정치적 기반을 마련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30여 년간 저지시티에서 쌓은 사회, 정치적인 활동기반이 토대가 되겠다는 계산을 했지요.”
■ 비즈니스 시작당시엔 인종차별 심해
그의 이민 시기는 1979년, 한국의 유신정권 말기였다. 정치적 성향이 맞지 않아 유학길에 올랐다. 브루클린 칼리지 학부에 입학했으나 1년 반 만에 비즈니스 쪽으로 눈을 돌렸다. 여러 군데를 탐색하다가 저지시티를 찾아 주민들과 얘기를 나눌 때 홈타운 필링이 들었다. 뉴욕시와 불과 20분 정도 떨어진 도시인데 주민들이 순박하고 착해 보였다. 마치 한국 같은 느낌이 들어 점포를 임대하고 비즈니스를 시작했다. 그가 선택한 스테이셔너리 비즈니스는 카드도 팔고, 기프트도 팔고, 잘 되는 품목이었다.
스테이셔너리 하면서 망한 사람 없다던 시절이었다. 품목을 찾을 때 유대인 친구가 한 조언이 있었다. 천천히 들어오는 10전의 이익보다는 빨리 들어오는 5전이 낫다. 바꿔 말하면 턴오버가 빨리 되는 비즈니스가 좋다는 충고였다. 그만큼 스테이셔너리가 마크업은 좀 낮은데 턴오버가 좋은 것이었다. 그동안 비즈니스의 기복은 크게 없었으나 이윤의 폭이 자꾸 떨어져 갔다. 원가는 오르는데 마진이 떨어지는 게 흠이라고 했다. 비즈니스를 처음 시작했을 때 인종차별을 많이 당했다. 백인들이 행패를 부리고 청소년들이 욕설하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2년쯤 지났을 때 인도계 의사 한명이 센트럴 애비뉴 길거리에서 백인 인종차별주의자들에게 맞아죽은 일도 있었다. 유색인종에게는 세를 놓지 않는다고 해서 주정부가 이지역의 모든 부동산 업자들에게 인종차별 벌금을 때린 적도 있었다.
그만큼 텃세가 심한 곳이기도 했다. 그곳에 정착한 한인이 32년 만에 시의원에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한인사회 인벌브는 1985년 허드슨 상인번영회 시절. 김규호 창설회장을 비롯해 조용래, 이건용 회장 등과 함께 활동했다. 대외담당 이사로써 미국 커뮤니티, 저지시티와 허드슨 카운티와의 협조관계를 담당했다. “저는 늘 조용래 회장과 이건용 회장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분들이야말로 뉴저지 한인사회에 없어서는 안 될 인물들이었습니다.” 이후로도 그는 뉴저지한인총연합회 부회장과 이사장, 북부뉴저지한인회 부회장으로 한인사회에 관여했다. 가족은 부인 안성희와의 슬하에 두 아들을 두었다. 큰아들 지환은 매서추세츠 병원 레지던트로 있고, 작은 아들 준혁은 에듀케이션센터 C2에서 디렉터를 맡고 있다. 그는 한때 병석에 계신 모친을 30여년 수발한 효자이기도 했다. 어머니 병간호 때문에 한인사회 저녁 미팅에 참석을 못하거나 회의만 끝나면 식사도 못하고 빠져 나오는 경우가 많았다고 했다. 효자노릇 하느라고 단체장들에게 거만하게 보였을지도 모른다는 것.
이제 한 달 남짓 남은 기간 그에게는 선거자금이 절실하다. 목표는 5만 달러. 가장 넓은 지역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로 부터 가장 많은 자금을 모은다는 것이 그의 목표다. 그래야 주류사회에서 얕보지 못할 한인들의 응집력을 보여줄 수 있고, 또 정치 토박이 타운에서 한인들의 힘으로 정치인을 배출했다는 점을 과시하고 싶다고 했다. 조종무 <뉴저지 고문/ 국사편찬위 해외위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