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한인회 이사장 시절 처음으로 한인회관에 역대 한인회장 사진을 부착하는 존영식을 가졌다. 오른쪽부터 정수일, 이문성, 김판기 부부, 장용호 부부, 조시학 부부, 김정희, 서삼덕.
미국시장에서 한국산 가발이 사양길에 들어서던 70년대 중반 뉴욕 브로드웨이에는 가발의 대체 품목으로 인조가죽(비닐) 가방, 잡화, 커스튬 주얼리, 의류 등이 자리를 잡으면서 새로운 한인상가가 본격 등장하는 시기를 맞았다. 브로드웨이 25가부터 32가에 이르는 짧은 거리에 터를 잡은 이 한인 도매상가는 80년대와 90년대에 걸쳐 전성기를 구가했고, 렌트가 치솟아 한계점에 이른 2,000년을 고비로 수그러드는 모습을 보였다. 20년 정도 그 전성기를 맞았다가 이제는 전설로 남게 된 브로드웨이 한인 도매상가.
초창기 브로드웨이 도매상가를 손수 일군 당시의 주역들은 허드슨 강 건너 저지시티에 정착하면서 가발 페들러나 점포 운영의 기본 경험을 쌓은 초기 이민자들이었다. 도매상으로의 점프 유혹에 빠져들었던 이들은 비슷한 시기 타이밍을 제대로 맞췄다는 동질성을 지니고 있다. 김혁규, 최희용, 정수일, 김동빈, 김재설 등 이른바 ‘브로드웨이 5인방’ 별명이 붙은 초기의 개척자들이다. 이제는 전설처럼 되어버린 브로드웨이 한인상가 주역 가운데 정수일은 일찍이 부동산에 눈을 뜬 편으로 초창기 매입한 부동산과 2,000년 이후 동업 투자한 2개의 상업용 몰을 관리하면서 평탄한 은퇴생활을 맞고 있다.
정수일의 미국 이민 시기는 1973년 말. 부인(이순희)의 취업 케이스로 입국한 그는 이민초기 브루클린 흑인지역인 핏킨 애비뉴에서 힘든 가발 페들러 경험을 2년 정도 쌓았다. 풀턴 스트릿에서 1년 남짓 점포를 운영하다가 볼륨을 키워 도매를 하고 싶었다. 그의 브로드웨이 도매상가 진출은 1977년 4월에 이루어졌다. 이민 4년 만에 그의 첫 번째 꿈 ‘코리아나 트레이딩’을 설립했다.
도매를 시작하면서 정수일은 취급 품목을 결정하는 단계에서 고민을 했다. 가발은 이미 사양길에 들어섰고 인기품목인 가방은 김혁규와 최희용이 기선을 제압하고 있었다. 결국 잡화로 선회했는데 당시 잡화는 유득종이 잡고 있었다. 그에 이은 두 번째 주자였다. 잡화 품목의 주종은 모자, 스카프, 장갑, 신발 등이었다. 1977년 4월 ‘코리아나’라는 상호를 등록하고 처음 서브리스로 입주한 곳은 1212 브로드웨이(30-31가 사이). 가방을 취급하던 호산나와 절반을 나눈 1,000 스퀘어피트 넓이에 렌트는 1,500 달러정도였다. 도매업이 제법 활기를 띠는가 했는데 빌딩 주인과 불화가 싹트기 시작했다.
점포에서 지하실로 내려가는 볼트를 테넌트는 당연히 사용할 수 있는데 시리안 주이시인 랜드로드가 쓰지 못하게 막는 것이었다. 부당함을 들어 항의했으나 막무가내였고 이후로 계속 괴롭힘을 당했다. 리스가 끝나면 연장해줄 것 같지도 않고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무언가 준비해 놓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그때 브로드웨이 선상의 건물들은 이미 포화상태였고, 브로드웨이 29가에서 6애비뉴 쪽으로 반블럭 떨어진 지점의 트러킹 회사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브로드웨이를 벗어나서도 장사가 될까 하는 우려가 있었지만 창고로 써도 되겠다는 생각으로 2,500스퀘어피트 크기 4층 건물을 1979년에 디파짓 조금 하고 모기지를 얻어 매입했다. 브로드웨이 도매상인으로서는 최초의 빌딩 소유주가 된 셈이다. 한동안 창고로 사용하다가 80년 코리아나가 이사를 하면서 ‘혁 트레이딩’의 김혁규가 바로 옆 건물로 렌트를 얻어 이주해 왔다. 이를 계기로 오프브로드웨이에 시장이 형성되면서 29가가 살아났다.
한편 1979년에 브로드웨이 한인상인번영회가 창립되면서 이 지역 상인들은 단결을 모색했다. 일요일 휴업도 결정하고 안전을 위해 관할 경찰서와도 유대를 강화했다. 번영회는 김영철, 김혁규가 회장을 맡다가 경제인협회로 명칭을 바꾸면서 최희용, 김재설 등으로 이어졌고, 82년 제5대 회장에 정수일이 선출됐다. 그의 임기 중에는 브로드웨이 한글학교와 은행설립 준비가 계획대로 잘 이루어졌다.
한글학교를 준비하는 단계에서 임시로 교사 한명을 채용해 코리아나 빌딩에서 회원 자녀들에게 토요일마다 한글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또한 은행 설립을 위한 타당성 조사가 시작됐고, 다음 대인 김동빈 회장 때 BNB(브로드웨이 내셔널 뱅크)가 문을 열었다. 당시의 경제인협회는 막강한 단체로 발돋움했고 그해 연말 롱아일랜드 레너즈에서 열린 리테일 고객 초청 ‘경제인의 밤’ 행사에는 1200명이 참석하는 성황을 이루었다.
일반적으로 미국의 도매시장 유통구조는 제품 쇼에 가서 오더를 하고, 딜리버리를 받아 소매를 하는 시스템인데 비해 당시 브로드웨이 한인상가의 풍속은 좀 달랐다. 도매상을 직접 방문해 짧은 시간에 현금거래가 이뤄지면 그 물건을 당일에 팔고 다음날 그 대금으로 또 거래하는 ‘캐시 앤드 캐리’ 스타일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브로드웨이 시장이 뉴욕일원 한인들의 경제에 적지 않은 공헌을 했다고 그는 자부한다.
한인 도매상가 전성기에는 미국 경기가 대체로 좋았던 때여서 장사도 잘 됐다. 마진도 좋았고 새벽에 6시에 점포를 열어 밤늦게까지 영업을 하면서 한인 특유의 근면 성실까지 발휘됐다. 지방에 도매상이 없던 시절, 인근 각지에서 트럭을 몰고 오는 소매상들이 줄을 이었다. 뿐만 아니라 남미와 아프리카 지역에서도 보따리 장사들이 몰려들었고 때로는 수만 달러짜리 컨테이너 현금거래도 있었다.
한때 테넌트로서의 설움을 맛보았던 정수일은 불과 몇 년 사이에 건물 가격이 10배나 뛰는 부동산 투자의 묘미를 터득했다. 브로드웨이 초기 5인방이 계 형식으로 27가에 12층짜리 건물을 공동으로 매입한데 이어 28가에도 1만 스퀘어 피트짜리 중형 빌딩을 산 것이 요즘은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뉴저지 퍼세익에도 창고 건물을 매입한 그는 2005년 회사를 그곳으로 옮기면서 28년간 정들었던 브로드웨이를 떠났다. 이 무렵 치솟는 렌트를 감당하기 어려운 한인 상인들의 탈 브로드웨이 행렬이 이어지던 때이기도 했다.
뉴욕한인사회 봉사로는 경제인협회장 외에 20대 뉴욕한인회(회장 이문성) 이사장과 평통 수석부회장, 전남대 동창회장, 재향군인회 부회장을 역임했다. 그의 한국 경력은 전남대 졸업 후 공군 의장대장(대위 예편), 서울대 행정대학원 행정학 석사(2년 코스). 대학시절 미국 선교사 사라 빌(한국명 배사라) 교수의 영향으로 세례를 받은 후 대구, 대전에 선교사로 파송되어 4년간 캠퍼스 선교활동을 한 특수한 경험을 갖고 있다. 현재 팰리세이드장로교회 장로. 자녀는 1녀2남. 딸 미셀(신영, 변호사), 큰아들 데이빗(지혁, 컴퓨터 프로그래머), 막내아들 폴(바울, 교사)이 있다. 조종무<뉴저지 고문/ 국사편찬위 해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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