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빠의 못 다 이룬 꿈에 강요당해 코흘리개 시절부터‘학대’수준 훈련 부모실직, 집 쫒겨나고 입에 겨우 풀칠 대학팀 가기 위해 새벽까지 책과 씨름 마침내 재정보조 받고 UCLA팀 입성
아트 펠릭스가 패사디나의 한 고교 운동장에서 딸 안젤리카의 타격연습을 지켜보고 있다.
■ 소프트볼 소녀, 안젤리카 이야기
“ 꿈은 이루어진다”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꿈을 이루기 위해선 헌신이 필요하다. 희생과 노력의 뒷받침이 없다면 꿈은 늘 꿈으로 남는다. 안젤리카 펠릭스도어린 시절부터 간절한 꿈을 품었지만, 어쩌면 그것은 아버지가 그녀의 가슴속에 깊숙이 밀어 넣어준 것인지도 모른다.
안젤리카는 UCLA 여자 소프트볼 팀에 들어가길 원했다. 전국 대회에서 무려 열 한차례나 우승을 차지한 UCLA 팀에 합류하는 것이 10여년 전부터 그녀가 꾸어온 꿈이었다.
일곱 살 되던 해 UCLA 소프트볼 캠프에 참가했던 안젤리카는“ 여신” 같은 선수들의 플레이를지켜보며 “지금 저들이 속한 곳이 앞으로 내가서야 할 자리”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안젤리카의 꿈은 거기서 시작됐지만 딸을 매체로 한 아버지 아트의 꿈은 그 이전에 이미 구체적으로 자리를 잡았다.
고교시절 야구선수로 활약했던 아트 펠릭스(49)는 안젤리카에게 운동을 시키고 싶어 했다.
아내인 프랜시스도 윌슨 하이스쿨에서 소프트볼을 했기 때문에 안젤리카의 주 종목도 아버지 마음대로 소프트볼로 결정됐다.
마음을 정한 아트는 일찌감치 어린 딸을 상대로‘ 담금질’에 들어갔다. 그의 조련은 거의“ 아동학대” 수준이었다.
안젤리카를 강력한 오른손 타자로 만들기 위해 그는 당시 두 살이었던 안젤리카가 왼손으로장남감이나 다른 물건을 던질 때마다 소리를 질러 혼을 낸 뒤 그녀의 왼손을 등 뒤로 묶는‘ 만행’을 저질렀다.
코흘리개 시절, 아버지에게 등을 떠밀려 소프트볼 리틀리그에 가입한 안젤리카는 ‘연중무휴’로 공을 던지고, 치고, 달렸다. 성탄절과 1월1일도예외가 아니었다.
다행히 안젤리카는 소프트볼에 소질을 보였지만 아버지의 스파르타식 훈련을 그리 달가워하지않았다.
240파운드의 두터운 몸집에 검은 모자를 깊숙이 눌러쓰고 언제 어디서건 늘 검은 색 선글라스를 착용하는 아트는 함부로 대하기 힘든‘ 험악한포스’를 뿜어낸다. 그는 늑대의 목소리를 지녔다.
조용조용 지시하거나 타이르는 법이 없다. 거의악을 쓰거나 고함을 친다.
이런 일화가 있다. 열두 살 되던 해 토너먼트경기에 출전한 안젤리카는 두 명의 주자가 나간상태에서 스트라익 아웃을 당하고 말았다. 경기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트는 예상대로 끝없는‘ 악다구니’를 풀어놓았다.
때마침 개를 데리고 산책하던 이웃의 한 여성이 이 광경을 보고 아트에게 강력한 태클을 걸었다. 그 여성은 안젤리카에게 “만약 아빠가 앞으로 다시 한 번 너에게 소리를 지르면 그 즉시 운동을 그만 두라”고 충고해 주었다.
아버지와 딸의 관계는 UCLA 소프트볼 캠프를계기로 개선됐다. 아버지는 여전히 으르렁댔지만안젤리카는 더 이상 겁먹거나 움츠러들지 않았다.
링컨 하이스쿨을 다니던 4년 동안 안젤리카는아버지의 꼼꼼한 지시를 받아가며 수천 번의 배팅연습을 하고, 수천 개의 땅볼을 잡아냈다.
아버지의 엄격한 조련을 거쳐 링컨 하이스쿨부동의 숏스탑으로 확고히 자리 잡은 안젤리카는 고교 4학년 마지막 정규시즌을 6할6푼6리의평균타율로 마감했다. 일곱 개의 홈런을 쳐냈고49타점을 기록했다.
UCLA가 관심을 갖기에 충분한 성적이었다.
그러나 UCLA에 들어가려면 일정 수준 이상의SAT 점수를 얻어야 했다.
타격과 수비훈련에 이어 학업성적을 올리기 위한 또 다른 강훈이 시작됐다. 하루의 훈련을 마친 후 매일 새벽 1시까지 책과 씨름을 했다.
성적 올리기는 타율 높이기보다 힘들었다. 하지만 꿈을 이루려면 반드시 건너야 할 장애물이었다.
프랭클린 하이스쿨 재학시절 성적 미달로 야구부에서 퇴출당한 쓰린 경험을 지닌 아트는 장녀인 안젤리카와 그보다 어린 두 아들에게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털어놓고 학업을 게을리 말것을 당부했다.
그러나 넘어야 할 장애와 극복해야 할 도전은SAT 성적만이 아니었다.
빈곤은 그들이 넘어서야 할 또 하나의 거대한벽이었다.
전 세계를 뒤흔든 심각한금융위기의 여파로 USC 사무직원으로 근무하던 프랜시스가 레이오프를 당했다.
2010년 6월의 일이었다.
그 다음해 봄에는 아트가다니던 회사가 문을 닫았다.
불경기의 한 가운데서 부부모두 직장을 잃은 것이다.
실업수당으로 다섯 식구의입에 겨우겨우 풀칠을 해가며 몇 달을 버티었지만, 결국 그마저 끊어졌다.
렌트를 내지 못해 아파트에서 강제퇴거를 당한펠릭스 일가는 한동안 낡은 밴을 거처삼아 지내야 했다. 프랜시스가 전에 살던 아파트의 창문을통해 집안으로 들어가 가재도구와 운동기구들을하나둘씩 빼냈고, 이들을 처분한 돈으로 식구들의 주린 배를 채웠다.
그렇게 또 몇 달을 버틴 뒤 이들은 프랜시스의노모 집에 임시 거처를 마련했다. 좁디좁은 공간에 많은 사람이 북적이다 보니 마찰계수가 높아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얼마 못 가서 아트와 프란시스의 결혼생활이삐꺽대기 시작했다. 펠릭스 일가에게는 현실이 바로 지옥이었다.
이런 환경 속에서도 안젤리카의 필사적 사투는 중단 없이 계속됐다.
온 몸의 근육이 욱신거릴 때까지 치고 때리고달린 후, 집으로 돌아와 공부에 매달렸다, 마룻바닥에 실신하듯 널브러져 잠이 든 상태에서 “공부해야 해”라는 잠꼬대를 하기도 했다.
네 차례 SAT 시험을 치른 끝에 안젤리카는UCLA 입학에 필요한 점수를 따냈다. SAT 시험비용은 아트의 친구가 내주었다.
한편 아트는 하수도 공사장 인부로 일하면서여기저기 막노동판을 전전했고 그렇게 모은 돈으로 조그마한 아파트를 얻었다.
게다가 그는 딸이 다니는 링컨 하이스쿨의 보조 코치직까지 맡게 됐다. 안젤리카도 UCLA로부터 입학허가를 받았다. 운동선수 장학생으로 선발되지는 않았지만 학비와 생활비를 거의 모두지원받는 꽤 좋은 조건이었다.
아버지와 딸이 공동으로 품은 꿈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링컨 하이스쿨 소프트볼팀 4학년들을 위한 송별행사에서 코치인 마크 샤피로는 안젤리카의어깨에 한 팔을 두른 채 정색을 하고 말했다“. 안젤리카처럼 독한 선수를 제대로 지도한 사람은죽어서 꼭 천당에 갈 것이다. 하지만 우리 가운데누구든 그곳에 가면 저 무시무시한 아트를 다시만나게 될 것이다.”샤피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안젤리카는 아버지에게 달려가 그를 얼싸 않았다. 샤피로는 그날도 어김없이 검은 색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색안경 뒤쪽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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