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기후 계획이요? 영원한 뉴욕지킴이로 남아야죠”
<사진 천지훈 기자>
미ㆍ중 정상이 만나고 지난 수개월동안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 등을 감행했던 북한이 대화를 제의하는 등 한반도 정세가 복잡한 이 때, 지난 2년간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한 행보를 보여준 제15기 민주평화통일 자문회의 뉴욕협의회 김기철 회장, 그는 81년 미국에 이민, ‘장사꾼’으로서 자리를 잡고 한인사회 봉사에 뛰어든 지 30년, 그의 이야기를 듣는다.
-민주평통 뉴욕협의회가 한인사회에서 어떤 존재인가?
▲사실 평통위원으로 10년간 있으면서 동포사회와 동떨어진다고 생각해왔다. 내가 회장이 되면 어떤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메모를 해왔다. 그래서 2011년 7월 1일 임기를 시작하면서 첫째 동포들에게 가까이 가자, 그래서 통일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자고 결심했다. 둘째 평통위원들이 결집하면 큰 힘이 된다, 이 힘을 동포사회 발전에 기여하자고 맘먹었다.
동포사회가 발전하면 대한민국이 발전할 것이고 한국이 발전되면 통일이 앞당겨질 것이다. 이것이 통일운동이다. 187명의 평통 위원들을 운영분과위원회와 통일정책, 교육, 경제, 문화/예술 등 12개 분과로 나누고 분과별 첫 모임을 3주만에 모두 치렀다. 15~16명의 분과로 모이니 대화가 되었다.
초는 자신의 몸을 밝히면서 세상을 밝게 한다. 아무리 초가 많아도 성냥이 있어야 불을 밝히고 불이 당겨지는 순간 버려지고 아무도 그것에 대한 고마움을 모른다, 우리가 초 역할을 하자, 빛이 안 나더라도 수고는 우리가 하고 공은 다른 데로 돌리자고 했다.
-그동안 해온 일들과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점은?
▲뉴욕,뉴저지,커네티컷 한인회와 함께 한 3.1절 기념행사, 북한 로켓 발사 관련 규탄 성명 발표, 평통 가족의 밤, 탈북 대학생 지원, 노인운동회에도 참여하여 진행을 도왔다. 특히 지난 5월 남성욱 평통 사무처장을 초청, ‘김정일 사망 후 김정은 체제 평가와 향후 전망’ 주제 강연회를 했는데 예약인원 300명을 초과할 정도로 한인들이 통일에 관한 뜨거운 관심을 보여주었다. 또 평통 처음으로 문을 연 통일학교는 8차례 동안 UN대사, UN무관, 한국 전문가 초청 강연을 들었다. 무엇보다 한인사회에서 평통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 가장 자랑스럽다.
-한국에서는 무엇을 했고 언제 이민 왔는가?
▲71년 충주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비즈니스에 뛰어들었다. 건축자재인 철근, 빔, 파이프 등을 취급하는 철강회사를 다니다가 1976년 직접 대림철강을 경영했다. 한 고등학교 친구가 ‘돈은 지식을 낳을 수도 있고 지식은 돈을 낳을 수 없다’고 말했지만 당시 패기 넘치던 나는 지식은 돈을 지배할 수 없으나 돈을 지식을 지배할 수 있다고 말했다. 지금도 그 소신은 변함없다. 건축붐이 일었던 80년말 어음 부도를 맞았다. 살 길이 막연하던 차에 비행기티켓을 셋째 누나가 마련해줘 81년 미국으로 왔다.
-비즈니스의 노하우가 있다면?
▲형제자매가 60년에 미국에 이민와 있던 터라 2년간 쌀 한톨 안사고 셋째누나와 최원영 매형 집에서 먹고 자면서 맨하탄 가게에 나가 일했다. 잡화가게는 최대한 캐셔대를 안쪽으로 놓고 가게 밖에 내놓은 제품은 쉽게 집을 수 있는 제품을 내놓아야 한다. 손님이 돈을 내러 안으로 들어가면서 가게안의 물건을 보게 되고 더 비싼 것을 사게 된다. 가게의 워치맨을 하면서 터득한 노하우다.
과거에는 장사를 하는 사람에게 ‘상놈’이라 했다, 내 주장 없이 무조건 상대방의 비위를 맞추려면 철저하게 상놈이 되어야 한다. 물건을 사가면 댕큐 하되 그 말 한마디에 진심이 담겨져 있어야 한다. 나는 ‘장사꾼’이라는 말이 마음에 든다. 비즈니스에는 위치가 가장 중요하다.
-자영업은 언제 시작했는가?
▲1년간 아내와 내 주급을 모두 모으니 1만1,600달러 정도가 되었다. 매형 소유의 브루클린 가게를 얻어 잡화가게를 시작했다. 1,200스퀘어피트 규모의 가게였는데 돈이 모자라 가게면적의 2/3만 채워서 시작했다. 82년 11월1일 같은 날 형님은 맨하탄에서, 나는 브루클린 플랫부시 지역에 장갑, 모자, 액세서리 등을 취급하는 잡화가게 ‘Lucky Store’를 열었다. 처음에는 장사가 되지 않아 형님의 도움을 받았지만 여름이 되니 장사가 너무 잘되어 형님도 오시라고 해 한 블럭 거리에 같은 잡화가게를 열었다.
-형제간 우애가 좋고 비즈니스도 함께 한다는데?
▲형제자매, 조카들이 이민 초기부터 지금까지 롱아일랜드 남쪽 바닷가 휼렛 하버(Hewlett Harbor) 인근에 모여 산다. 브루클린 가게를 16년 동안 한다음 1996년부터는 지금까지 롱아일랜드에서 뷰티서플라이를 경영하고 있는데 형제친지들도 모두 뷰티 서플라이로 업종을 전환했다. 아버님은 충북 중원군에서 농사를 지으셨는데 한문공부를 많이 해 동네사람들의 존경을 받았고 2남4녀에게 엄한 가정교육을 시키신 덕분이다.
-험한 지역에서 장사하는데 어려움은 없었는가?
▲손님 100% 흑인인 동네인데 가게에 도둑이 한달에 8번 들어온 적도 있다. 물건을 훔쳐 가면 끝까지 따라가 싸우다가 병에 얻어맞고 입술이 찢어지는 게 다반사였지만 한번 지면 온 동네 도둑이 다 몰려든다. 지금 생각하면 미친 짓이었다. 한번 도둑질 한 녀석이 물건 사러 또 오기도 했다. 9.11때는 등록교회인 참사랑교회를 통해 가게 물건을 기부한 소식이 타운신문 1면탑에 나오기도 했다.
-뉴욕타임스(2011년 11월9일자 A섹션1면, 9면)에 소개되었는데 흑인밀집지역에서 영어를 잘 구사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사업을 했냐는 질문에 영어 잘못해도 필요시 몸짓 사용하면 된다, 얼마든지 성공한 사업가가 될 수 있다고 해 영어 스트레스를 받는 자영업자에게 용기를 주었는데?
▲미국에서 태어난 두 딸에게 집에서 영어를 쓰면 혼내고 한국말만 하게 했다. 애들이 한국말도 하게되었지만 정작 내가 영어가 늘지 않았다. 뉴욕타임스 인터뷰 요청이 왔을 때 나보다 훨씬 부자들이 한인 중에 많다, 나는 더불어 사는 것에 성공의 잣대를 둔다고 말했다.
-비즈니스가 잘되고 봉사도 열심히 하는 그 힘은 어디서 나온다고 생각하는가?
▲아내 김영숙은 충주고등학교 시절 하숙집 건너집 살던 초등학생 꼬마로 내게 공부를 배우러 왔었다. 10월 9일 결혼한 후 21일 비행기를 타고 결혼과 동시에 미국에서 이민생활을 시작했다. 미연, 미나 두 딸을 낳아 키우며 함께 비즈니스를 시작했던 아내는 지금도 매일 아침을 정성껏 차려준다. 매일 새벽기도를 다녀온 후 아침을 지어주는데 이 밥심이 걱정없이 밖에 나가 활동하게 한 것이다.
한인회장 시절에도 매일아침 9시 회사에 출근하여 한시간동안 일한 다음 오전 11시 한인회 사무실에 출근했었다. 아침만 같이 먹고 저녁은 늘 밖에서 먹는다. 워낙 사람 사귀는 것을 좋아하여 일주일에 너댓번은 골프를 치며 친목을 도모한다. 모임이 많다보니 현재 유명회사 매니저, 약사인 두딸이 자랄 때 시간을 많이 못내 애틋한 정을 별로 못주어 미안한 면이 있다.
-1983년 한인사회 봉사를 시작한 지 30여년이다. 뉴욕시의회 사회봉사상, 미하원의원회 사회봉사상, 2006년에는 대한민국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상했다. 그 와중에도 고려대학교 정책대학원 최고위 과정을 수료했고 평소 책을 많이 읽는다는데, 또 어른을 잘 모신다는데?
▲삼국지를 세 번 읽으면서 유비의 선하고 훌륭한 인품을 사모하게 됐다. 전직이 있으니 현직이 있다. 평가야 어떻든 나름대로 열심히 했고 그만한 예우를 받아야 한다. 한인사회에 기여한 분은 특별 우대하고 있다.
-임기 후에는 무얼 할 것인가? 혹 한국 정계에 관심 있는 가?
▲아이들이 이곳에서 태어났고 후손들이 살 곳이다. 영원히 뉴욕 지킴이로 살면서 한인 2세 중 주류사회 정치인이 될 재목이 있으면 불쏘시개 역할을 하는 후원자가 되는 것이 앞으로의 계획이다.
<민병임 논설위원>
●김기철 회장은
1952년 충주 출생인 김기철은 81년 미국 이민 후 82년 브루클린 ‘Lucky Store’ 경영, 83년 브루클린 한인회 봉사 86년 뉴욕한인회 봉사, 제25대 이사장, 88년 뉴욕한인청년회의소 (JAYCEES) 창립회원, 회장, 전미청년회의소 뉴욕시 지역회장을 역임했다.미주한인청소년재단 수석부회장, 뉴욕한인뷰티서플라이협회 감사, 뉴욕한인상공회의소 수석부이사장, 대뉴욕한인교회협의회 부이사장 역임, 평화통일정책자문위원회 위원 등을 지냈으며 2003년~2005년 제28대 뉴욕한인회장을 역임했다. 1991년부터 현재 롱아일랜드 소재 ‘Lucky Beauty Supply’를 경영하고 있으며 현재 평통회장으로 6월말 2년 임기가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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