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외 청소년에 정체성 심는 일, 1세대가 해야 할 일”
뉴욕한인회장 이취임식에서 주명룡(왼쪽) 전회장으로부터 한인회 기를 전달받고 있는 이정화(중앙). 오른쪽은 이기웅 부회장 러닝메이트.
당시 허리훈 대사 마라톤 완주 약정액 8만5,000달러 기부 재단 출범
청소년 모국방문 추진사업위원장 추대, 지금까지 한인청소년 1,000여명 다녀와
한인회장 시절 한인회관 악성 모기지 해결 국민훈장 표창
뉴욕에서 13년째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뿌리교육재단의 창설 동기는 ‘한인사회 차세대 인물을 길러야 된다’”는 목적에 있었다. 이스라엘이 1948년에 독립하면서 벤구리온 총리가 울판이라는 조직을 통해 해외에 나가 있는 유대인 청년들에게 언어와 문화, 역사를 가르치는 역할을 한 것이 조명되었다.
당시 뉴욕총영사 허리훈 대사와 전현직 한인회장들간 그런 내용의 의견들이 오가는 가운데 허대사가 “말로만 하지 말고 한번 실천해 보시라, 도와드리겠다.”는 제언이 계기가 되었다. 이에따라 뉴욕일원 28개 단체장이 참석한 2000년 2월28일 회동에서 제안 설명이 있었고 참석자 전원이 동의했다. 뜻밖에도 이정화 전 한인회장이 청소년 모국방문 추진사업위원장으로 추대되어 그해 여름 40여 청소년들의 한국연수가 성사되었다.
국제교육진흥원이 경비 전액을 부담하는 행사였다. 이듬해 2월에는 IRS의 허가를 받아 ‘뿌리교육재단’이라는 비영리단체로 공식 출범했다. 이때 마라토너인 허리훈 대사가 제25회 뉴욕마라톤대회에 출전, 완주함으로써 구간 마일당 약정금액으로 모아진 8만5,000달러를 뿌리교육재단에 기부했다. 이 기금은 재단의 출범 자산이 되었으며 이듬해 동포 청소년들의 모국방문 사업에 전액 투입되었다.
뿌리교육재단의 프로그램 목표는 자라나는 해외 청소년들에게 한국 전통문화와 역사의식을 심고 현재 남북으로 대치된 상태의 한국에 대한 안보 교육, 그리고 상당수준 발달돼 있는 한국의 첨단 과학기술에 대한 정보를 가르침으로써 코리안의 정체성을 기르자는 것으로 요약된다. 이 프로그램에 따라 이제까지 모국방문 체험에 다녀 온 청소년들은 모두 1,000명에 육박한다.
매년 70-80명 수준. 9학년과 10학년 학생들의 모국 체험은 성공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요즘은 언어면에서 한국어 위주의 프로그램으로 전환. 짧은 시간내에 소통효과를 극대화시키기 위해 학생 자신의 한국어 소통이 가능하고 학부모의 열의도 참작 사항이다. 초창기 한국의 경회대와 협력사업으로 진행하다가 수년전부터 고려대와 협력하고 있다. 재단은 또한 매년 4월 참가 학생들의 미동부지역 명문대 탐방으로 MIT, 하버드, 예일, 브라운대 등 투어를 실시하고, 참가학생-학부모들이 함께 참여하는 음악회 및 포럼을 열고있다.
지난 3월 포럼에는 300여명이 참석했다. 뿌리교육재단의 산파역, 이정화의 미국이민은 1975년 부인의 의사 취업이민으로 이뤄졌다. 영남대 졸업 후 은사인 이효상 국회의장의 비서관으로 근무하다가 이의장이 선거에서 낙선하면서 미국 이민을 결행하게 되었다. 부인은 한국에서 전문의 과정을 마쳤지만 미국 의사 자격시험부터 새로 시작해야 했다.
브롱스의 몬테피오리 병원에서 인턴과 레지던트 과정을 다시 밟으면서 1년 넘게 준비과정을 거쳐 자격시험에도 비교적 빨리, 쉽게 합격했다. 한편 이정화는 이민 초기 브로드웨이의 가방 도매상 호산나에서 점원으로 경험을 쌓은 후 귀금속 행상 길에 나섰다. 부인 대신 학교에 다니는 두 자녀들을 돌보며 돈을 벌기에는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있는 행상이 좋았다. 귀금속은 크게 무겁지 않아 핸드 캐리하기에도 편했다. 주로 은과 금목거리를 팔고 샀다.
유대인 도매상으로부터 주얼리를 구입해 미국 보석상과 각지에 흩어져있는 한인들의 잡화가게를 상대로 팔았다. 매상과 마진이 좋았다. 어느해 성탄절 대목 퀸즈 저메이카에서 행상을 하다가 차까지 따라온 강도에게 물건을 다 빼앗기는 사고를 당했다. 다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 때마침 모친의 미국방문으로 이래저래 그의 행상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평소 보아두었던 맨하탄 47가 다이아몬드 스트릿에 점포를 세내 진출하는 기회가 되었다.
이때가 80년대 후반 ‘미주보석’으로 간판을 걸었다. 그의 뉴욕한인회 참여는 80년대 초 강익조 회장의 권유에 따라 이사로 인벌브하다가 조병창 회장 때 후반기 이사장을 맡았고 귀금속 협회장을 지낸후 1995년 제24대 뉴욕한인회장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그가 한인회장에 출마한 이유는 악성모기지로 운영이 어려워진 한인회관을 정상화시키려는 의지에서 출발했다.
회관 구입서부터 이를 지켜봤던 그로서는 역대 회장들이 회관 모기지 미상환으로 인해 차압 직전까지 가는 상황을 목격하면서 회관 적자를 메꾸고 자생시키는 방안을 강구하겠다는 일념에서 출마했다. 선거기간 중 신만우, 배시영, 이기웅 등 후보들이 4파전으로 난립될 뻔 했으나 후보간 조정으로 이정화가 무투표 당선되었다.
임기 중 그는 한국의 경희의료원과 의료보험 계약을 체결해 동포들이 모국방문 중 한국의 의료보험 혜택을 받도록 함으로써 인기를 얻었고, 연례 코리언 퍼레이드를 한인회 단독으로 주최-주관함으로써 3만달러의 흑자를 냈다. 이를 바탕으로 한인회는 회관 부채상환 모금운동을 전개한 끝에 30만 달러 모금 실적으로 그간의 악성모기지를 해결함으로써 차압위기에서 벗어날수 있었다. 이때 뉴욕총영사관도 적극 참여, 박노수 대사는 지상사들의 대표기관인 코참(당시 회장 김영만)으로부터 10만달러를 갹출해 내는데 일조를 했다.
한인회관 정상화를 이룬 공로로 그는 1997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으며 2003년에는 성공한 이민자들에게 수여되는 엘리스 아일랜드 상을 수상했다. 한인회장 임기를 마치고 그는 47가로 복귀해 ‘이정화 다이이몬드’를 운영했으나 얼마 후 비즈니스에서 손을 떼고 뿌리교육재단 일에 전념하게 되었다. 그의 귀금속 비즈니스는 행상과 점포 운영을 합쳐 20년이 조금 넘었다.
최근 뉴욕한인회 역대회장단 협의회장 임기를 끝낸 그는 현재 뿌리교육재단 명예회장과 한미 헤리티지재단 회장 대행을 맡고 있다. 가족은 세인트 메리병원에 근무하는 부인 권애령과의 슬하에 1남1녀를 두었다. 컬럼비아대를 졸업한 딸(재복)은 워싱턴 DC의 로펌에서 특허변호사로 일하고 있으며, 보스턴대를 나온 아들(재림, 폴)은 금융 연구기관인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S&P)에 근무 중이다.
조종무<뉴저지 고문/ 국사편찬위 해외위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