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곳에 폭탄 파텬 박힌 채 밤새 이동”
150명 이끌고 유엔군 소속 그리스군 대위로 참전
종전후 3년간 병상에...평생군인 꿈 못이뤄 아쉬움
“내 나이 스물여섯. 여기서 이대로 죽을 순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20일 맨하탄 어퍼이스트에 위치한 아파트에서 만난 스피리돈 알레비자코스(88)씨는 가끔 눈을 감고 회상에 잠기긴 했지만 그날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1951년 10월3일. 그날은 대위 계급을 달고 150여명의 부하를 이끌고 있던 유엔군 소속의 그리스군 장교 알레비자코스 씨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날이었다.
경기도 일대에 주둔하던 알레비자코스씨의 부대에 유엔군 상부로부터 중공군이 점령 중인 연천 313고지를 탈환하라는 임무가 떨어졌던 것이다. 90세를 바라보는 알레비자코스씨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날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강한 그리스 억양이 인상적이었다.
“조금씩 조금씩 조심스럽게 적진을 향해 전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눈앞에서 폭탄이 터지더니 모든 게 암흑으로 변해버린 겁니다.”
중공군 141사단의 예하 부대의 갑작스런 기습공격에 알레비자코스씨 자신은 물론 주변에 있던 병사들이 모두 쓰러졌던 것이다. 그리곤 얼마가 지났을까. 알레비자코스씨가 의식을 조금 되찾았을 땐 중공군의 목소리가 숲속 여기저기서 들리고 있었다. 두려웠다. 그러나 더욱 그를 두렵게 만든 건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동료 병사들을 확인 사살하는 중공군의 총성과 그 메아리 소리였다.
알레비자코스씨는 “그리스에 두고 온 어머니가 그 시점 생각이 났다”며 “죽을 순 없었다. 아니 살고 싶어졌다”고 당시 상황을 고백했다. 이런 그의 기도가 응답이었을까. 막상 중공군이 알레비자코스씨에게 다가왔을 때 그들은 어깨 부위를 발로 툭툭치며 그가 살아있음을 확인했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확인사살을 하는 대신 장교용 벨트와 권총, 지도를 빼앗더니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당시 알레비자코스씨는 몸 18부위에 폭탄 파편이 박히는 중상을 입었다. 당연히 걸을 수 없었고, 기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그래도 살아야했기에 그는 누운 상태에서 몸을 조금씩 움직여 밤새도록 이동했다. 알레비자코스씨는 “수 시간을 그렇게 움직이다가 우연히 개울가를 만났다”며 “이 때 물을 조금 입에 넣자 긴장이 풀렸는지 그대로 다시 기절을 해버렸다”고 회상했다.
다음날 알레비자코스씨는 그 일대를 지나던 미군 탱크에 발견돼 목숨을 건졌다. 그야말로 기적이었다. 이후 그는 그리스 아테네로 귀환했다. 하지만 고향에 도착한 후에도 각종 수술과 재활치료로 무려 3년여 시간을 병상에 누워있어야 했다. 물론 그 후 50여년간 오른쪽 팔과 다리를 제대로 쓸 수 없었고, 크고 작은 병치레에 시달렸음은 당연했다.
그럼에도 알레비자코스 씨는 “한국을 위해 옳은 일을 했다고 믿기 때문에 후회는 없다”고 했다. 다만 “평생 군인으로 살고자 했던 그 꿈을 이루지 못한 건 아쉬운 일”이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알레비자코스씨는 한국전 참전 직전엔 그리스 내전에 투입됐고, 그 전엔 독일 점령군에 맞서는 게릴라군으로 활동했다. 당연히 한국전이 끝나면 명예로운 군인의 길을 계속 가게 될 줄 알았던 것. 하지만 6.25전쟁에서 큰 부상을 입었던 그는 어쩔 수 없이 런던과 뉴욕에서 정치,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해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의 삶으로 방향을 틀어야 했다.
“그 때(6·25전쟁) 이후 한국을 마음속에서 지운 적이 없어요. 아직까지 선한 한국인들의 눈빛이 생생해요. 한국을 사랑합니다.” <함지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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