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신 목사 <에리자베스 한인교회>
얼마 전에 친한 신학교 동창이자 가장 친한 친구 목사가 한국으로 귀국을 했다. 미국에서 제법 큰 교회의 부목사로 잘 섬기고 있다가 갑자기 귀국을 결정해서 그 이유를 보았더니 서울 영등포에서 조그만 교회를 담임하는 아버님이 갑자기 병환으로 사역을 하지 못하게 되셔서 그 교회의 담임으로 부임하여 간다는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담임목사 자리의 세습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이해가 되고 측은한 마음이 들었던 것은 친구의 아버님이 지난 30년 동안 개척하고 사역하던 교회가 소위 말하는 대형교회가 아니라 교인이 100여명이 되지 않는 가난한 동네 교회였기 때문이었다.
이 친구는 미국의 한인교회 중에서도 수천 명의 교인이 다니는 교회의 잘나가는 목회자였는데 얼마든지 큰 교회에 청빙이 될 수 있는 것을 마다하고 가난한 아버지 교회에 목회자로 부임을 한 것이다. 동창은 아니지만 비슷한 때에 알고 지내던 다른 젊은 목사도 얼마 전에 한국으로 귀국을 했다. 미국에서 초등학교 때부터 소위 말하는 조기유학을 하고, 신학 박사학위까지 마친 후에 멋진 모습으로 이 친구도 서울의 아버님이 담임하는 교회의 부목사로 부임을 하여서 갔다.
다른 것이 있다면 먼저 친구는 작고 가난한 교회로 갔지만 이 친구는 이름만 대면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아! 할 정도로 유명한 수만 명 교인의 초대형 교회로 간 것이다. 이미 몇 년 있지 않으면 은퇴할 유명한 아버지 목사님의 자리를 세습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고, 유학과 귀국까지 황태자 교육을 받고 갔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다.
두 친구를 보면서 한국 귀국과 부임이라는 같은 상황이지만 내 마음은 그렇게 다를 수가 없었다. 똑같이 목회를 하는 아버님 밑에 났는데 한 친구는 어려운 달동네 목회를 이어 받고, 다른 친구는 대접받는 자리에 대형 교회 목사로 세워지게 되니 하나님도 참 불공평 하신 게 아닌 가 투덜댈 수밖에 없었다.
여왕벌과 일벌은 처음에는 똑같은 알로 태어난다고 한다. 그런데 유충 때 일벌들이 특수한 분비샘에서 만들어 내는 ‘로열 젤리’를 얼마나 먹느냐에 따라 그 수많은 알들 중에 하나는 여왕벌이 되고 나머지는 일벌이 된다. 로열 젤리를 조금만 먹고 그 다음부터 일반 꿀을 먹으면 싫던 좋던 평생 중노동에 시달리다 짧은 생애를 마감하게 된다.
반면에 평생을 로열 젤리만 먹고 자라면 일벌보다 스무 배가 긴 생매를 살며 여왕으로 군림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노력과 수고보다는 불공평한 운명이 미래를 결정하는 불편한 진리가 한낱 곤충인 벌의 세계에도 존재하는 것이다. 특혜라는 로열 젤리를 먹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평생을 노력해도 평범할 수밖에 없는 현실은 우리로 하여금 실망하고 좌절하게 한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인데 이렇게 불공평할 수 있을까. 나도 목회자의 아들로 태어나서 목회를 하고 있지만 세습 받을 교회도, 유명한 목회자의 자녀도 아니니 솔직히 질투도 생기고 불평하는 마음도 든다. 더 짜증나는 것은 그렇게 혜택을 받으며 준비된 자리를 차지한 친구가 목회를 망쳐야 거봐라 할 수 있을 텐데 그게 아니라 오히려 더 잘 할게 아닌가.
이런 저런 불편한 마음을 가지고 생각을 하다가 한 가지를 깨닫게 되었다. 오히려 하나님이 그러한 하나님인 것을 감사해야 한다는 깨달음이었다. 내가 가지고 있었던 공평함에 대한 불평은 실은 평등(equal)과 공평(fair)에 대한 오해였던 것이다. 평등과 공평은 비슷한 말이지만 그 뜻은 완전히 다르다. 평등은 equal, 똑같은 것을 말한다.
그러나 공평이라는 것은 같지 않을 수도 있지만 fair한 것, 옳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일까 평등하신 분일까? 궁금한 마음에 성경을 검색해 보았더니 성경에는 아예 ‘평등’이라는 단어를 한 번도 쓰지 않았다. 대신 ‘공평’이란 말은 수도 없이 많았다. “만군의 여호와는 공평함으로…” “여호와께서는 지존하시니 이는 높은데 거하심이요 공평과 의로 시온에 충만함이라” 그 순간 깨달았다. 하나님은 ‘획일적인 평등을 원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공평을 원하시는 하나님’이란 사실을. 하나님은 평등하시지 않으시지만 공평하신 분이시라는 것을. 나의 불평과 불만이 그렇게 부끄러울 수가 없었다.
친구와 나는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치 크레파스 통에 다양한 색깔의 크레파스가 들어 있는 것처럼 우리도 다양하게, 그러나 함께 모여 아름다운 무지개를 이루게 만드셨다. 만일 크레파스를 한통 샀는데 흰색만, 혹은 검정색만 들어 있다면 당장 가서 바꾸지 않겠는가. 이 색이 있으면 저 색도 있어야 하듯이 우리 서로 다름을 감사하고, 주어진 환경과 형편에서 최선을 다해 내가 지닌 색을 가장 아름답게, 선명하게 드러낼 때 작품이 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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