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명선
며칠 전 나지막이 던져준 남편의 말 한마디가 아직도 마음 한구석에 웅크리고 있다."목소리가 왜 이렇게 크고 말이 급해 진거야. 천천히, 조용히, 예전처럼 해요. 당신 많이 변했네"
변한 게 아니고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내 몸이 스스로 반응 하는 것뿐이라고, 어설픈 이유를 달고 남편의 가벼운 핀잔에 에둘러 마침표를 찍고 돌아선다. 태연한 척 돌아 서지만 마음 한편에서 왠지 모를 서글픔이 잔잔하게 밀려온다,
변해 버린 게 그것뿐이던가? 밉상 맞게 뱃살이 허리를 붙잡고 놔 주질 않고, 코앞이 어른거려 돋보기는 온 종일 귀에 걸고 다니며 평소보다 초과된 분량의 노동만 해도 마디마디 마다 고통의 대가를 치르게 된다.
민망한 순간에도 잘 참아 내고 작은 일에도 쉽게 흥분되어 깊숙이 가라앉은 구정물까지 퍼 올린다. 배려하고 이해하기보다 이유를 캐묻고 고집을 세운다, 세월에 기대 묻혀가며 가끔 뒤돌아보고 저항도 해 보았지만 어느 사이 다수의 기류에 합류해서 걷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된다.
오로지 나이 먹는 탓으로 돌리기엔 빈곤한 핑계인 것이 서글퍼지는 이유이다. 학창시절 동경하던 어른이 계셨다. 항상 한복을 즐겨 입으시는데 여름에는 뽀얀 모시 한복을 곱게 다듬어 입으셨다. 주름진 얼굴이지만 화사하게 화장도 하고 자그마한 핸드백도 손에 꼭 쥐고 다니셨다 모든 사람에게 정중하고 상냥하게 대하며 목소리는 높낮이 없이 소곤소곤 하면서도 하고 싶은 말은 끝까지 다 하시는 왜소한 채구이시지만 왠지 크게 느껴지는 분이었다.
그 분을 뵐 때 마다 나도 나이 들면 저 분처럼 고상하고 곱게 늙어 가야겠다고 다짐 했었다. 곱게 나이 들어가는 것은 모든 사람의 바람이고 여자들에게는 더욱 간절한 소망일 것 이다. 변하기 싫다고 애써 위장술을 써보고 치장을 과하게 해 봐도 별반 차이도 없는데 기적이라도 바라듯 시간과 에너지를 소비한다.
물결같이 시간이 흐르다 보면 머리에는 하얗게 서리가 내리고 해마다 이마엔 훈장이 하나 둘 늘어나고 쩌렁쩌렁 하던 목소리마저도 주저앉는다. 세월을 역류 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받아 들여야만 한다. 하지만 내 안에 감춰진 또 다른 나의 모습이 변해 가는 것은 진정 서글픈 일이다. 차곡차곡 다져 올린 마음의 둑이 아직도 견고하게 받치고 있다고 생각 했는데 굽이굽이 굽어진 길을 돌아 이만큼 와서 뒤돌아보니 어느 사이 조금씩 무너져 내린 둑가엔 무성하게 잡초가 자리 잡고 있다. 더 많이 채워 져야할 곳간은 비워져 가고 하나씩 버려져야 할 자리에는 승화되지 못한 찌꺼기들이 제비집처럼 붙어있다.
나이는 먹고 연륜은 쌓아 간다고 하던가. 아직 연륜을 말하기엔 턱 없이 부족한 나이이지만 까먹은 나이 위에 쌓아 올린 연륜이 얼마만큼 인지 눈금자라도 대어 볼 수 있을까? 자격증도 없고 성공 했다고 꽃다발을 안겨 주지 않아도 차근차근 책장을 넘기듯 성실히 쌓아 올린 품위 있는 연륜을 흠모 하고 싶다.
아마도 내가 어린 시절 동경했던 그 분도 오랜 세월 꾸준히 채우고 다듬었기에 그렇게 봄볕처럼 포근하게 향기 품은 모습 이었을 거다. 지인이 보내 준 아름다운 글 중에 “나이가 들어 쇠약하여질 때도 삶을 허무나 후회나 고통으로 생각하지 않게 하시고 나이가 들면서 찾아오는 지혜와 너그러움과 부드러움을 좋아하게 하소서.
그리고 성공한 사람보다 소중한 사람이 되게 하소서 "라고 ...
토끼와 다람쥐 외로운 풀벌레 소리까지 다 품고 스치는 바람결에도 화답하는 저 푸르른 숲은 언제나 그 자리에 변함이 없다, 그 숲에서 청명하게 지저귀던 노래 소린 간데없고 새벽부터 새때들의 울음소리가 하늘을 찌른다. 아낙들의 이바구처럼 소리를 드높이는 저 새들도 아마 내 동창생쯤 되는가 보다. 얘들아! 너희들도 변한거니?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