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넘어 다시 뛰어든 청과업...인생 2막 열었죠
로버트 메넨데즈 연방 상원의원과 친분을 유지하고 있는 최재흥
40년 청과업 노하우로 소액비즈니스 창업지원도
매일 15시간 노동으로 오히려 건강유지
뉴욕한인청과협회장 시절 장학재단 설립 가장 보람
“남들은 나이 70에 은퇴한다고들 하지만 촛불도 꺼지지 전에 반짝한다고 한번 더 용기를 낸다는 의미로 시작했는데 의외로 성과도 좋고 또 매일 15시간 노동을 하니까 감기 한번 안 걸리고 건강이 유지됩니다.”
지난해 3월 뉴저지 플레인필드에 농장직송 청과업체인 파머스 마켓을 오픈한 최재흥(71, 전 청과협회장)의 엔돌핀 넘치는 스토리다. 1978년, 이민 5년 만에 청과업에 발을 들여놓아 30년 넘게 한 우물을 파던 그는 말년에 포트리에서 중형 동서양 식품점 ‘굿네이처’를 운영하다가 한아름에 매각하고 나서 잠정 은퇴에 들어갔었다. 앞만 보고 달려온 시절에 쌓인 피로감과 그간 대외활동으로 누적된 스트레스를 풀겸 휴식기간에 돌입했던 것. 그러나 그와 같은 느슨한 생활도 2년을 넘기지 못했다. 태권도 사범 시절 단련된 정신력이 그를 가만 놔두지 않았다.
중부 뉴저지 플레인필드에 1만5,000스퀘어피트짜리 소매공간을 찾아 파머스 마켓을 오픈한 것이다. 헌츠포인트 도매시장을 통해 구입한 기본적인 청과물 외에 인근 농장으로부터 들여오는 싱싱한 채소, 과일 등을 산지 가격과 비슷하게 팔았다. 뉴욕에서 30여년 청과상을 운영해 본 경험에 세상물정 다 겪은 생활의 지혜를 한데 묶어 그야말로 착한 가격에 고객들을 편하게 대하는 상혼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의 하루 일과는 새벽 5시에 시작된다. 아무도 없는 가게에 나가 전날 일어났던 모든 거래의 결산을 하고, 아침 8시 직원들이 출근하면 오전 내내 함께 달라붙어 일한다. 점심 후부터는 그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전화를 받고 사회활동으로 들어간다. 특히 요즘은 창업 지원하는 일을 무엇보다 우선시 한다. 기존 사업체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사업상 변화를 원하던가, 와서 봐 달라고 하면 브루클린도 가고 퀸즈도 찾아간다. 40년 노하우를 컨설팅 하는 셈이다.
그가 현역 복귀를 했다는 소문이 뉴욕 바닥에 퍼지자 비슷한 연배들 사이에 “대단하다.”, “나이 들어서도 뭐든 할 수 있다.”, “나이 먹은 사람들, 위축되지 말자.”는 반응들이 나오고 있다. 그리고 자신도 잘 결정했다고 생각한다. 1년3개월의 성공적인 파머스 마켓 운영을 바탕으로 그는 최근 뉴저지 80번 도로변 라커웨이에 똑같은 크기, 똑같은 스타일의 파머스마켓 오픈을 앞두고 있다. 청과상 외에 생선, 델리도 곁들여 규모 있는 마켓으로 늘리면서 본인이 가꾸던 재능을 사회에 기부한다는 취지로 소액 비즈니스를 꿈꾸는 사람들의 창업지원도 하고 있다.
그는 한때 뉴욕한인사회에서 남 못지않게 봉사활동에 시간과 재정을 투자한 인물이다. 청과인협회장(1981년 제9대)을 거쳐 서울올림픽 뉴욕후원회장, 2세들의 미국정치 참여를 독려하고 후원하는 코람문화재단 회장 등을 역임했다. 한국 정치상황에도 관심을 보여 김영삼 대통령. 이회창 후보 뉴욕후원회장을 역임했으며 한나라당 뉴욕후원회장 10년을 끝으로 일단 한국정치에선 손을 뗀 상태이다.
그는 직능단체로는 뉴욕에서 처음 창설된 뉴욕한인청과상조회의 산 증인이기도 하다. 창립 초기 불량배들이 들끓던 헌츠포인트 청과시장에서 도매상들로부터 인종적인 괄시를 받던 일, 불이익을 당하지 않기 위해 한인상인들에게 부당한 대우를 일삼던 댕기보이, 알마타, K&H, B&J.등 도매상으로 몰려가 단체시위를 벌인 끝에 공식사과를 받아내며 무릎 꿇리던 일, 새벽시장에서 강도를 만나 총과 칼에 찔리며 현금을 탈취 당하던 암울했던 시기, 이에 대항하기 위해 야구방망이로 무장해 자구책을 취하던 일 등을 겪으며 협회가 회원들의 권익 찾기 운동에 성과를 거둔 것도 사실이다.
도매상에 크레딧이 형성되어 있지 않은 시기여서 항상 잠바 주머니에 몇 천 달러씩 현찰을 갖고 다니기 때문에 강도들의 쉬운 표적이 되었던 한인들, 그로인해 목숨을 잃은 회원도 있었고, 24시간 오픈하는 가게에선 새벽녘에 들이닥친 권총강도에 피해를 입은 점원들도 수두룩했다.
시장이 오픈되는 밤 12시부터 새벽 5시까지 춥고 배고픈 가운데 어디가 물건이 싼지, 또 누구 가게에 무슨 일이 있는지, 서로 정보를 나누던 협회였다. 70년대 초부터 시장을 드나들던 초기의 인물들은 지금 시장에서 보기 어렵다. 이미 고인이 된 사람들도 있고 은퇴길에 들어선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남미에서 왔다던 송모, 오영감 외에 김원준, 장순영, 조병식, 장영식, 전홍규, 이성종, 홍현칠, 손영탁 등 수많은 창설 멤버들이 헌츠 포인트의 주인공들이었다.
20명 남짓 창설 회원들이 300명 수준으로 늘어나던 78년 최재흥이 합류했고, 회원 7~800명으로 전성기를 누리던 81년 그는 9대 회장에 선출되어 몇 가지 사업을 활성화시켰다. 전대에 창설된 추석맞이 대잔치를 확대 운영하면서 뉴욕한인사회의 최대 민속잔치로 위상을 높였다. 플러싱 코로나 파크에 잔치마당을 펴놓고 한국의 인기 연예인들을 대거 초청, 공연하는 분위기가 몇 년 전까지 이어졌다.
협회 내부적으로는 헌츠포인트 시장 내에 사무실이 별도로 마련되고 회비제도를 도입하면서 회원들의 출입증 제도가 실시되었고 80년에는 봉사실이 설치되어 수시로 변하는 규정, 가격, 시장정보를 회원들에게 전해주었다.
임기 중 또 하나 그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일은 1980년 송년파티에서 제안한 장학재단의 설립이었다. 그 자리에서 모금된 4만 달러가 씨드머니가 되어 뉴욕 한인사회 장학회의 시발점이 되었던 것.
개인적으로 최재흥은 미국정치에 관심이 많았다. 정계에 진출하는 2세들을 후원하기 위해 20년 전에 16 커미티를 조직했고, 뉴저지 에디슨 시장에 출마한 준 최 후보를 도와 그를 당선시킨 사례도 있다. 그 외에 sekawk 미국 정치인으로 로버트 토미국 정치인으로 로버트 토리첼리, 게리 애커맨, 프랜치 라익터, 친한파 찰스 랭글도 후원했다. 이 커미티는 코람문화재단으로 명칭을 바꾸어 요즘도 활동하고 있다.
한국에서 경희대 졸업 후 민주당 사무총장 고흥문 의원의 비서관 생활을 하던 최재흥은 고의원의 도움으로 75년 이민 길에 올랐다. 워싱턴의 체육관에 태권도 사범으로 초빙되었던 그는 79년 뉴욕으로 진출, 도장을 운영한 적도 있었다.
가족으로는 부인(신복순)과의 슬하에 1남1녀를 두었다. 75년 이민 길에 올랐다. 워싱턴의 체육관에 태권도 사범으로 초빙되었던 그는 79년 뉴욕으로 진출, 도장을 운영한 적도 있었다. 딸 정은은 아시아 개발은행 중역인 남편 따라 필리핀 마닐라에 가 있고, 미 육군 대위로 전역한 아들 최범진은 로펌을 갖고 있으면서 현재 뉴저지 호보큰 검사장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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