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사박물관의 한국관을 꾸미고 있는 권수자.
한땀 한땀 팔순에도 손바느질 ‘진정한 장인’
한복을 미국 사회에 알리고 한인들에게 한복사랑 정신을 일깨워 준 권수자 한복연구가, 그는 자연사박물관의 한국관을 만드는데도 온 힘을 다했다. 또 청실홍실회 회장으로서 무료합동결혼식 봉사활동을 해온 그는 8순 나이에도 짱짱한 목소리로 우리옷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한다.
▲자연사박물관, 도포를 짓다
뉴욕 자연사박물관에 가면 노랑 저고리에 푸른 치마를 입고 바느질 하는 안방마님과 옥색 도포를 입고 책 읽는 양반을 볼 수 있다. 82년부터 준비 작업에 들어가 84년 완성된 자연사박물관 한국관에 권수자 한복연구가의 모든 열정이 들어있다. 그는 메트 창고에서 한국관련 소품과 한복을 찾아내고 그의 지시대로 미국인 조각가가 한국인형을 만들었다.
“처음 조각가가 머리를 크게 만들어 육모관이 안 맞았다. 이마를 훤하게 내놓도록 다시 만들었다”는 그는 양반에게 옥색 두루마기를 입힌 후 그 위의 갑사 도포는 직접 만들어 입혔다. 드디어 1984년 한국관 개관 후 그곳 소극장에서 한달동안 한복패션쇼를 했다. 코넬대 한인학생들은 매일 두세시간을 운전하여 뉴욕으로 한복 모델을 하고자 달려왔다.
권수자는 보통 1년에 5~6번 한복 패션쇼를 했다. 하버드대 뮤지엄 한복 패션쇼, 캐나다 토론토 대학, 미 공립고등학교에서 연예인, 외국인 모델을 등장시켜 열성으로 한국을 알렸다. 메도우 코로나팍에서 매년 봄 열리는 아시안 아메리칸 페스티벌에서는 한국관이 가장 인기가 좋았다. 이곳에 한복패션쇼가 열리면 200여명의 관객이 몰려들었고 미스 뉴욕, 한인여성, 뉴타운 고등학교학생들이 모델이 되었다. 이 모든 것은 한복 연구소가 있어서 가능했다. 1981년 권수자는 72가 잭슨 하잇츠에 종로한복연구실 문을 연 것이다.
“한국 홍보를 하고 취미도 살리기 위해서였다. 종로라는 이름은 종로통에 한국의 얼이 심어져있기 때문이다. 80년에 뉴욕에 와보니 한국 부채 하나 파는 곳이 없어 가슴 아프게 생각했다. 제대로 된 한복을 입은 사람도 없어 본격적으로 한복에 관심을 가졌다. 안동 인간문화재가 만든 태극선 부채를 사다가 나눠주고 한인단체 연말연시 행사마다 한복을 상품으로 내놓았다. 그 결과 한복을 맞춰 입는 한인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후 플러싱과 엘름허스트로 장소를 이전하여 20년 이상 종로한복연구실을 운영하며 한복이 결혼식에만 입는 옷이란 인식을 벗어나 파티에도 입게 하며 한복 문화를 널리 인식시켰다.
1983년부터 코리안 퍼레이드에 참여했고 미스 유니버스 등의 한복을 만들고 1985년부터 15년간 청과상조회 추석맞이 잔치에서 종로한복패션쇼를 열었다. 골동품을 구하러 한국의 청학동으로 가서 베틀, 물레, 지게, 함지박들을 수집해오기도 했다.
“초창기에는 한복을 알리기 위해 모임에 혼자서 한복 입고 참석했었다.
한복 패션쇼를 하자니 치마가 너무 거추장스러워 걸을 수가 없다, 이마를 내보이기 싫다던 모델이 나중에는 미스 미국도 한복 입고 무대에 서고, 서로 모델이 되려했다.”
동대문 시장에서 한복원단을 수입하고 한인동포 여성 체형연구도 하자 미 대학과 한인단체에서 문화 강좌를 해달라는 요청도 쏟아졌다. 이대 신난숙 교수가 뉴욕방문 중 한국일보 광고를 보고 전화하며 함께 FIT 패션쇼도 했다.
1992년 4월에는 복식사학자 석주선 박사가 뉴욕 IBM갤러리에서 전통한국의 미 전시회를 여는데 함께 참여하여 한국문화 선양을 위해 힘썼다. 이 모든 활동에 당시 뉴욕시장인 데이빗 딘킨스 초청으로 ‘3월의 모범여성’으로서 미세스 딘킨스과 자리를 같이 하는 등 주류사회에도 ‘한복연구가 권수자’의 이름을 널리 알렸다.
또한 권수자는 뉴욕한인회 26대, 27대 한인회 이사로 활동했고 불우이웃돕기 등 한인사회 봉사도 잊지 않았다.
“어느 날 필라에서 음식점 하는 부인이 전화를 하여 아이들이 엄마 아빠 결혼사진이 왜 없어하고 묻는다며 지금이라도 하면 안돼요 하고 말했다. 그래서 날을 잡고 뉴욕으로 오라고 했다.”
봉고차에 부부와 3남매, 아주머니까지 6명이 뉴욕으로 오자 당시 종로한복실과 함께 운영하던 종로 미용실에 잠잘 곳을 만들어 재우고 미용을 포함, 드레스, 식장까지 무료로 식을 치러주었다. 그래서 94년 발족된 것이 청실홍실회다. 총무로 일을 많이 한 써니여행사를 비롯 김스보석, 안나꽃예술원, 써니여행사, 그레이스지 미용실, 신부방, 스튜디어 아트타운, 포그니 혼수방, 해피바잉 가구 등이 모여 무료합동 결혼식을 치러주었다. 15여년동안 뉴욕 외 필라 2커플, 워싱턴DC 2커플 등 수많은 커플이 식을 올렸다.
“순수한 친목과 봉사를 원칙으로 모인 단체로 불우한 환경 속에서 꿋꿋하게 살아오면서 결혼식을 못 올린 한인들에게 소망을 심어주고자 했다.
한인사회 산 증인인 그는 6년 전 맨하탄 103가로 연구실(212-662-0184)을 옮기고 올해로 33년째 뉴욕의 한복 보급을 위해 노력 중이다. 한땀 한땀 장인 정신으로 손바느질을 가르쳐 한복을 짓는다.“2세들에게 한복 디자인의 의미를 알리고 교육시켜야지. 내 머릿속에 봉제, 패턴 다 들어가 있어, 전도도 하고....” 그는 FIT학생들과 직장여성, 주부들에게 손바느질 외에도 삶의 경험자로서 인생 상담까지 한다.
▲한복의 아름다움을 미국에
1928년 경북 풍기 출생인 권수자는 3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바느질에 취미가 있었다. 원래 어머니의 바느질은 유명하여 대신들의 의복을 만들 정도였다. 그는 어머니와 올케가 외출하면 어깨너머로 배운 바느질을 혼자 해보았다.
“본견 저고리를 모두 뜯어서 빨아서 풀 먹여 다시 꿰매 입었어. 실과 가위를 갖고 이웃집에 가서 만들었지. 깃, 섶 달고 다리미질까지 한 완성품은 섶이 나오고 잘못되었어도 그걸 몰랐어. 우리집 바느질은 다 알아, 남들이 일부러 아가씨 저고리 참 예쁘네요 하면 신이 나서 떡을 줘도 안먹고 다른 집으로 자랑하러 가는 거야, 하하하.”
어린 권수자는 둘째오빠를 따라 중국으로 가서 고등학교에서 공부했고 2년 후 해방이 되면서 조선의 고향 풍기로 돌아왔다. ‘외국 갔다 왔다고 선생을 하라고 해’, 그래서 평화봉사단 지도자로 공부를 가르치고 인삼회사를 다니는 등 17~18세 시절 재미있게, 바쁜 나날을 보내다가 19살에 여섯 살 위인 최경일씨와 중매결혼 했다.
그때부터 그는 다섯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남편과 함께 타월과 메리야스, 기타 물품을 취급하는 사업을 크게 해왔다. 6.25 후에는 동네 고아들을 거둬들여 아침이면 세수를 시키고 새옷을 주고 밥을 먹여 나중에는 그들이 모두 ‘엄마’라고 불렀다.그의 나이 38세때 남편과 사별하고 혼자서 계속 사업을 하여 아이들을 뒷바라지 했다. 80년 5월 21일 유학간 아이들을 따라 뉴욕으로 왔다.
▲매일 매일이 재미있어
전통한복, 당의를 응용한 개량한복 등 지금도 바늘귀를 끼고 손바느질을 손수 하는 그는 평생 봉사하고 전도하며 살아 왔지만 별로 돈복, 상복이 없다. 그래도 ‘잘 살았다’는 보람과 자부심은 누구보다 크다. 5남매 중 큰아들이 대학시절 심장마비로 숨져 가슴에 묻어도 ‘다 하나님 뜻, 괜찮다’고 말한다. 뉴욕에서 개척교회를 세 곳 개척하며 남몰래 어려운 신자를 돕기도 하고 20커플 이상 중매를 서기도 했다.
1남 3녀 중 뉴욕대 출신 아들은 한국 중소기업 책임자로 일하고 큰딸은 시카고 한인회장, 한국학교 교장으로 활동, 둘째딸은 병원 카운슬러, 사위는 검사, 막내딸과 사위는 변호사다. 13명의 손자손녀, 증손녀를 두었다. “난 매일, 매일이 재미있어. 매일 이렇게 살고 저렇게 살고 다 하나님 뜻, 사는 게 재미있어야지. 플로리다 친구는 한달에 한번 전화해, 나와 전화하고 나면 정신이 번쩍 든대.” “뉴욕에 한복을 알리는 길을 닦아 놓아 기뻐. 너무 감사하고....51세에 이민 와서 돈 버는 데만 급급하지 않고 열심히 우리 문화 알리면서 주위에 봉사하고 살았고, 지금도 일할 수 있어서 감사해.”그는 오늘도 청춘의 나이로 살고있다.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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