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갑헌 (맨체스터 대학 철학교수)

또 한 해가 지나간다. 해 마다 되풀이 되는 연말 행사들이 줄지어 서있다. 몸이 몇이라도 다 감당하기 어렵다. 가능하면 이런 모임들을 피하려 하지만, 피할 수 없는 것들도 많은 것 같다. 한 해가 끝날 때가 되면 습관처럼 되돌아보게 되는 것이 지나간 시간에 대한 의미이다. 돌아보니, 또 한 해를 별로 한 일도 없이 바쁘게 지냈다는 것이요, 살아보니, 우리 인생이 별 것 아니고 참 시시하다는 느낌에 우울해진다.

해가 다 가기 전에 끝내야 할 일은 많은데 시간은 없고, 선물을 해야 하는데 무엇을 사야 할 지 아이디어도 없다. 거리에 가득 찬 자동차와 쇼핑몰에 넘치는 인파에 밀려다니며, 이런 크리스마스와 연말연시는 차라리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머리가 아프다. 이런 것 없이 좀 조용히 살 수는 없는 것일까?
시간에 쫓겨 사는 삶에 푸념을 하다가 헨리 나웬(Henri Nouwen)을 생각했다. 헨리 나웬 수사(修士) 가 내가 공부하던 학교에 2년 동안 강의를 하며 머문 적이 있었다. 시간에 쫓겨 사는 삶과 시간 속에서 성숙해가는 삶을 비교 하던 그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물론 그의 입장은 기독교의 세계관을 기초로 한 것이지만, 가는 세월에 초조해 하는 모든 사람, 바쁘게 살아온 삶이 허무하다고 느끼는 모든 이들에게 다 적용되는 지혜라고 생각했다.

그는 시간을 크로노스(Chronos)와 카이로스(Chairos)라는 두 그리스 말로 표현했다. 크로노스는 시계가 표시하는 시간의 흐름을 말한다. 시간에 따라 자신의 계획과 목표를 정하고 효과적으로 이를 잘 관리하여, 목표를 이루고 성공하려는 사람들에게 이 시간은 유용한 수단이다. 시간이 곧 財貨인 셈 이다.

정해진 시간 안에 목표를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하다가 지쳐버리는 우리 삶은 바로 이 크로노스라는 시간 속에 갇혀있는 삶이다. 시간에 쫓겨 피곤하면서도 조용히 물러앉아 자신을 돌아볼 시간이 없는 삶의 모순을 말한다. 그러나 카이로스는 단순히 흐르는 시간이 아니라, 이미 정해진 목적을 이루기 위한 성숙의 과정이 바로 시간의 흐름이라는 암시가 포함되어 있다.

토마토 한 그루를 심었다고 하자. 작은 토마토 모종이 자라고 성숙해서 마침내 열매를 맺게 되는 전 과정을 우리의 삶에 비유한다면, 카이로스가 뜻하는 시간의 의미를 잘 알 수 있을 것 이다. 비가 오고 폭풍이 몰아쳐도 성숙한 열매를 맺기 위해 자라는 토마토가 시간에 쫓기는 법은 없다. 지나간 순간순간이 모두 성숙한 토마토를 맺기 위해 한 걸음 더 나아간 보람이기 때문이다.

지난 한 해의 삶이 피곤하고 허무하다는 느낌이 들더라도 그 시간이 내 삶의 성숙을 위해 한걸음 더 나아간 과정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면, 바로 그 속에 삶의 보람이 있고 성취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 이다. 물론 자신의 삶이 무슨 목적을 위해 사는 삶인지 바른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일 년 열두 달, 하루 열두 시간, 비즈니스에 매어 있다가 피곤한 몸으로 집에 돌아오는 현실 속에서도 삶의 목적에 대한 확실한 깨달음이 있으면 우리 삶이 결코 시시한 것이 될 수 없다. 삶이라는 우리의 아름다운 건축물을 완성하기 위해 벽돌 하나 더 쌓아 올렸던 시간이 바로 이 한 해였다. 피곤했지만 보람을 느끼는 우리 모두의 연말연시가 되기를 기원한다. 다시 한 해를 보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