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집중취재] 미국 땅에 묻히는 한국의 문화재들
지난달 중순 맨하탄의 모 경매장. 추운날씨였지만 사람들의 열기로 후끈 달아올라 있었다. 주로 고가의 골동품이 출품된 이날 경매에서 한인들에겐 한 개의 작품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조선시대 왕실에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대형 목재 보관함이었다.
왕실을 상징하는 용과 봉황이 자개 형태로 조각돼 있는데다 세밀한 부분 하나하나에 장인의 정성이 묻어나 비전문가가 봐도 조선왕조의 위엄을 느낄 수 있는 일종의 보물급 문화재였다. 최종 낙찰까진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한인으로 보이는 60대 초반의 남성이 전화로 경매에 참가한 신원미상의 바이어와 경합을 벌인 끝에 결국 5,000달러 후반 대의 금액에 낙찰에 성공했다.
경매 후 어렵게 설득한 끝에 본보와 만난 이 남성은 “경매장에 생각보다 한국의 옛 왕실 물건과 같은 중요한 문화재가 많이 나오는데 한인이 아닌 자꾸 엉뚱한 사람들이 사가는 걸 본 후부터 이렇게 수집에 나섰다”며 “먼 훗날 내 이름을 건 박물관을 만들 계획”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남성은 낙찰 받은 보관함을 공개해 달라는 요청에 “괜히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다”며 손사래를 쳤다. 조선시대 왕실의 역사를 엿볼 수 있는 문화재가 음지로 가라앉는 순간이었다. 일제 강점기와 6.25전쟁 당시 해외로 반출된 보물급 한국 문화재들이 최근 들어 미국 내 일반 경매장에 자주 등장하고 있지만, 이처럼 개인 소장품으로 전락하는 일이 빈번해지고 있다.
특히 그동안 한국의 문화재 발굴이나 취득 사실을 언론 등을 통해 꾸준히 알려왔던 한인 수집가들조차 지난해 ‘호조태환권 장물 논란’<본보 2013년 1월12일자 A1면>을 계기로 모두 자취를 감춰 이 같은 우려는 더욱 커지고 있는 실정이다.
‘호조태환권 장물 논란’은 퀸즈 출신의 한인 고미술 수집가 윤원영씨가 대한제국의 최초 화폐인 ‘호조태환권’의 원판을 경매를 통해 낙찰 받아 이를 언론에 알렸지만 이후 ‘장물취득’ 혐의로 체포된 사건으로 원판은 미 연방정부에 의해 압류돼 한국 정부에 반환된 사건이다.
당시 한국정부는 호조태환권 원판의 환수를 공식 발표하며 한·미 공조 수사를 통해 문화재를 환수한 첫 사례라고 홍보했지만 미국 내에서 떠돌아다니고 있는 한국의 보물급 문화재를 발굴·취득하고 있는 한인 수집가들을 위축시키는 행동이었다는 비난만큼은 피하기 힘들었다.
퀸즈에 거주하는 B씨도 이에 해당하는 케이스. B씨는 자택 지하실에 마치 박물관의 한 전시실을 방불케 할 정도의 보물급 문화재를 다수 보관하고 있지만 장물 논란에 휩싸이고 싶지 않다는 이유에서 공개를 꺼리고 있다.
조선시대 화가 정선의 그림을 비롯해 조선왕조의 가구, 목불상, 충무공 이순신의 초상화 등 이미 전문가의 감정을 거친 작품들을 보유하고 있는 B씨는 “예전에는 빼앗겼던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를 찾아왔다는 생각에 한인 언론에 자랑도 했지만 윤원영씨가 체포된 이후 그럴 마음이 싹 사라졌다”고 말했다.
B씨는 “정식 경매장을 통해 하나하나 구매한 것들이지만 갑자기 한국 정부가 내 놓으라고 떼를 쓰면 할 말이 없을 것”이라며 “사실 미국에 나와 있는 문화재 중 약탈되지 않은 게 어디에 있겠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합법적인 경매장에서 산 물건을 장물이라고 주장하면서까지 윤원영씨를 체포한 건 너무했던 일”이라고 덧붙였다.
실제로 전문가들은 호조태화권 장물논란을 계기로 미국 내 한인 고미술 수집가들의 문화재 공개는 앞으로 쉽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일각에선 미국 내 한인 수집가들에 대한 가이드라인과 보상기준, 처우 방법 등 투명한 접근방식을 한국정부가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비록 이 같은 기준이 마련됨으로써 매입비용이 높아질 순 있지만, 숨어있는 문화재가 빛을 보게 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주장이다. 무엇보다 문화재 보유자들이 자유롭게 내놓고, 공개하고, 또 자랑을 할 수 있는 환경이 시급하다는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한인 수집가는 “물론 돈을 바라보고 이런 일을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우리 문화재를 지켜내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며 “한국정부가 이들을 인정해주고, 함께 일한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함지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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