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갑헌 (맨체스터 대학 교수)
나이가 들어가면서 머리가 빠지는 현상은 남자들에게 흔히 있는 현상이다. 필자도 예외가 아니어서 이제는 윗머리가 번쩍이는 것이 별로 기분이 좋지 않다. 정초 맹동(孟冬)의 추위를 피해 친하게 지내는 두세 가정과 함께 캐러비안 크루즈를 다녀왔는데, 찍은 사진이 수백 장이었다.
따스한 햇볕이 좋아서 모자를 쓰지 않고 사진을 찍었더니 제일 두드러지는 곳이 바로 머리였다. 엷어지는 머리에 신경 쓸 것 없이 모두 깎아버릴까 했더니, 아직도 양 옆과 머리 뒤 쪽에는 머리숱이 좋으니 깎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 우리 집사람의 의견이라, 그 의견을 존중하기로 했다.
옛부터 머리를 깎는 일은 심각한 일이었다. 유교의 효경(孝經)과 소학(小學)에 “우리의 몸은 부모님으로부터 받았으니 감히 훼손하지 않음이 효도의 시작 (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支始)”이라는 가르침은 조선 오백 년 선비들이 지켜온 심각한 계율 이었다. 머리를 길러 길게 따거나 장가를 가면 상투를 트는 것을 부모님 섬기는 첫 걸음으로 여기던 선비들에게, 머리를 자르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불효의 극치였다.
일본이 급격히 서양화 하면서 머리를 자르고, 조선말 대한제국 시절, 서양을 돌아보고 온 유길준 등 개화내각이 주도한 소위 단발령 (斷髮令)이 고종황제의 재가를 받아 1895년에 공포되었다. 황제와 황태자는 물론 심지어 대원군까지 모범을 보이기 위해 머리를 잘랐다고 한다. 천지개벽에 버금 하는 사변이었다.
관직에 있던 남편이 머리를 자르자 효도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 자결한 부인들이 속출했다. 연전에 작고한 이규태의 서민한국사 5권 후반을 보면 이 단발령에 대한 민중의 저항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 할 수 있다. 강원도 춘천에서는 민중들이 관청을 습격하여 머리 자른 관찰사를 죽였다고 한다.
그러나 세월은 모든 것을 변하게 한다. 6,70년대에 한국 젊은이들은 모두 장발족 이었다. 세계를 휩쓸던 비틀즈의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이런 긴 머리를 일종의 퇴폐적인 사회 현상으로 생각했고, 퇴폐척결에 나선 경찰들은 지나가는 젊은이들을 잡아 마구 머리를 잘라 놓았었다.
머리가 길던 필자도 하루는 덕수궁 앞을 지나다 잡혀 머리 한복판에 ‘고속도로’를 냈던 기억이 생생하다. 머리를 깎이며 ‘신체발부 수지부모……’ 어쩌고 하다가 잘난 척 한다고 경찰에 얻어맞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그 고속도로 보다 더 넓은 길이 머리 앞뒤에 훤하다. 상투를 틀던 옛 선비들도 대머리가 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선비라고 머리가 빠지지 않았을 것 같지는 않다. 대머리 위에 갓을 쓸 수는 없는 노릇이고, 남아있는 양 옆 머리와 뒷머리를 올려서 상투를 틀고 이를 보완하기 위해 망건을 쓴 후, 갓을 썼던 것은 아니었을까?
옛날로 되돌아간다면, “양 옆과 뒤에 머리숱이 좋으니 깎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우리 집 사람의 반대의견이 대단히 현명한 효부의 덕목이었으리라는 생각을 하며 유쾌한 하루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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