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선 <전 한인회 회장>
해마다 연말이 오면 늘 아쉬움에 발을 동동 구르다 손에 잡혀지지 않는 그 무엇을 남겨둔 채 남보다 며칠 먼저 한해를 마감하고 휴가지로 떠났었다. 다가오는 새해에는 지난해에 못 다 이룬 꿈에 소박한 소망 하나쯤 더해서 잘 살아봐야겠다고 다짐하며 ,새해 첫날을 휴가지에서 맞이하였다. 손가락 하나만 움직이면 연결되는 바깥세상과 스스로 단절해 놓고 온전한 나를 만나며 새롭게 충전하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다섯 시간의 시공간을 넘어서자 일주일 넘게 떠나있던 내가 살았던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또 다시 겨울이란 계절에 적응해야 하는 나는 온갖 사고와 신체 리듬까지를 리셋하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 발끝이 닿은 땅은 얼음처럼 차고 미끄러웠다
좁은 사무실 한 구석에는 지난 일주일여 동안 쏟아놓은 온 세상의 소식들이 구문(舊聞)이 되어 폐지처럼 쌓여 있었다. 인사차 보내고 떠난 카드에 대한 뒤 늦은 답장과, 예상치 못한 사람에게 온 카드가 어색하게 섞여 있는 책상의 한 모퉁이에서 낯익은 필체로 꼭꼭 눌러쓴 내 이름을 발견하니 비로소 내가 돌아올 자리였음을 느꼈다. 일주일 좀 넘게 닫아 두었을 뿐인데 마치 남의 방을 훔쳐보듯 호기심과 설레임으로 음성 사서함과 이메일을 열어 보았다.
내가 잠시 떠난 세상에 그네들은 나의 부재를 알지 못한 채 나를 향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연말연시를 맞아 크고 작은 모임이 있었다는 소식이며, 동창들과의 송년회를 어떻게 보냈다는 이야기들이 공허한 수다처럼 더 이상 관심을 끌지 못한 채 내 손끝에 쥔 마우스를 비켜가고 있을 무렵, 작은 메시지 창에 뜬 낯익은 이름을 발견했다. 그동안 동창 명부며 그 흔한 SNS 어디에서도 그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해 안타까웠는데, 세상 밖으로 꼭꼭 숨어 버린 줄만 알았던 그가 나를 찾고 있었다. 엊그제 소식을 주고받은 것처럼 담담한 어투로 두고 간 소식을 떨리는 마음으로 열어보았다.
지극히 소심하고 내성적이었던 나는 늘 교실 한 구석에 남아 홀로 앉아 있는, 나만큼이나 사람을 가리는 그에게서 연민을 느꼈었다. 내가 내미는 손을 외면하리라는 예상을 깨고 그는 내 손을 잡아 주었다 소심했던 그와 나는 마치 연인처럼 급속도로 가까워 졌다. 고등학생이 가져보는 희미하게 보이는 희망을 우리는 함께 나누었었다. 비록 각기 다른 대학으로 진학해 그와 나의 생활 반경이 달라졌다 해도 고교시절 부터 결혼 전까지 눈부시던 청춘의 시대에 그의 이름은 늘 첫 번째로 올려져 있었다.
비록 그가 내 누이에 연심을 갖는 조금은 불순한 의도가 있다 하더라도, 내 누이를 선뜻 시집보내고 싶을 만큼 참 믿음직한 친구였다. 돌이켜 보면 그때 우리들의 청춘은 무모하고 치기 어리기보다는 어설프고 유치했었다.
기껏해야 단성사와 피카디리극장을 전전하고 제과점을 기웃거리며 여학생을 훔쳐보던 일이나 제주도로 떠난 배낭여행이 어렴풋한 기억에 남아 있다. 그가 불우한 결혼생활로 인한 절망의 시절을 보낼 때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 채 말 없이 술을 따르기만 했던 나였었다. 그리고 내가 이곳으로 떠나오며 서로 사는 일에 골몰하다보니 연락을 주고 받은 지 어느덧 십 수 년이 지나가 버렸다.
살아가며 수 없이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도 나이가 들수록 지난날들에 대한 회한 같은 게 남아 있었던 까닭은 두고 떠나 온 것에 대한 그리움 이었나 보다. 내 젊은 날을 공유했던 그를 만나 그동안 온전히 써 넣지 못했던 청춘의 이력서를 다시 써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잊었던 지난날의 친구들을 찾는 일 또한 온전한 나를 만나는 첫 걸음이 될듯하다. 소박한 새해 소망 하나를 더하며 나 자신에게 평화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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