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인 이민자들 정서적으로 풍요로운 삶 누렸으면...”
▶ 교사.시인.한국학교 교장으로 2세교육에 남다른 열정
<천지훈 사진기자>
교육자, 시인, 한국학교 교장, 하는 일마다 열정과 성의를 다해 살아온 천취자 관장, 그는 한인들에게 취미와 여가생활을 찾게 해주고 후세들에게 한국의 얼을 가르치고자 천 문화센터의 문도 활짝 열었다. 그가 살아가는 이야기다.
●아버지로부터 배운 이웃봉사
교육자로 시인으로 한국학교 교장으로 일인다역을 해온 천취자, 그는 이 모든 것이 “아버지로부터 왔다”고 한다.그는 일본의 작은 도시에서 태어났고 어린 시절 기억에 아버지 천영학씨는 비행기 기름 관련 공장을 했는데 저녁이면 집으로 사람들이 아버지를 찾아왔다고 한다. 아버지는 그때 재일동포를 대상으로 한글을 가르치며 민족교육의 중요성에 대해 말했고 슬하의 5남매에게도 “전쟁시나 평화시나 남을 돕는 사람이 되라고 늘 말씀하셨다”고 한다.
어린나이에도 느낌은 왔고 초등학교 시절 온가족이 한국으로 귀국하는데 배를 타고 가면서 감개무량한 것이 “어서 가서 한국말을 빨리 배워야지” 다짐 했다. 천취자는 ‘언니 오빠가 모두 문학에 재질이 있었고 본인도 미대에 가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영향으로 국문학을 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것이 미국에 와서 40년 이상을 한글교육과 1세들의 민족 의식교육에 헌신하게 된 뿌리가 되었다.
1960년 숙명여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20대 초반에 바로 미국에 유학 와 영어를 열심히 배워야 했다.
“학생으로 63년에 미국에 와보니 지식에 대한 배가 너무 고팠다. 일본에서 한국으로 가서는 한국말, 미국에 와서는 영어를 배우면서 자신이 없어서 주눅이 들기도 하고 성격도 수줍어서 처음에는 적응하기 힘들었다. 매사 호기심이 많았지만 늘 뒤에서 조용히 있다 보니 사람 앞에 나서는 것이 무서웠다.”
한국에선 네, 그래요 하는 두 말뿐이니 ‘벙어리’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고 처음 미국에 와서 학교에 잘 안 나가니 영사관에서 학생비자를 검사를 하러 오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에 와서 살면서 스스로 표현을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고 자신의 뜻을 차근차근 말하는 법부터 자신을 훈련시키기 시작했다.
“지금도 기타도 잘 치고 싶고, 늘 배움에 대한 갈등이 있다. 내가 겪은 고통을 학부형들과 나누고 싶었다. 우리 전통에 대해 잘 모르는 학생, 예술적 재능이 있어도 발휘할 기회가 없던 한인들, 그들이 뭘 원하는 지, 그에 맞춰 배울 기회를 주자 싶었다.”보탬이 되는 사람이 되고자 한 마음이 오늘날 천문화센터(CHUN CULTURAL CENTER)를 열게 한 것이다.
본인 역시 롱아일랜드 대학 시절 서양화 개인 레슨을 받았고 신광한국학교 교장 시절 동양화를 배웠는데 ‘많은 2세들이 한국어와 문화에 대해 책으로 배우는 것보다 그림으로 표현하게 되면 참여도가 놓고 효과도 크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자연 천취자는 어려서부터의 미술에의 갈증도 풀게 되고 2010년 천예술학교와 천 갤러리를 운영하며 경험을 쌓아 천문화센터는 점차 자리를 잡고 있다. 그는 초창기의 뉴욕한인봉사센터(KCS)에서 부관장으로 30여명 노인이 모이는 교육프로그램을 진행, 정부 펀드 받는 방법도 알기에 모든 것이 센터 운영에 도움이 되고 있다.
유아부터 성인까지 전 연령대를 대상으로 진행되는 천문화센터는 한국일보 특별후원으로 문학, 음악, 미술, 무용, 컴퓨터 등 다양한 수강과목으로 이민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준다.
“드로잉, 수채화, 유화, 동양화 등은 기초부터 전문적인 수준까지 체계적으로 교육시키고 음악은 가요, 팝, 복음성가, 찬송가 연주 등, 문학반은 삶과 이민 정서를 표현하는 예술적 능력을 키워준다. 매년 정기적으로 작품발표회, 음악 콘서트, 문학발표회도 연다”
천취자는 그 자신 시 ‘맷돌’로 시문학을 통해 한국문단에 등단했고 2005년 시집 ‘낮에도 꿈이 있다’를 발간한 시인이다. 그는 시집을 발간하며 “40여년을 겪어내는 문화와 언어의 갈등으로 해서 나에게서 소외당해 오는,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문자인 한글에 대한 나의 애착과 향수요. 외래어에 잠식당해가는 순수한 나의 한글말씨에 대한 버팀목이기도 하다”고 했었다.“고 했었다.
●학생 지도에 열정과 보람 지녀
천취자는 롱아일랜드 대학원 교육학과와 코넬대학 가정상담학을 수료했는데 교육학 석사논문으로 ‘왜 우수한 한국학생들이 미국에서 낙제하는가’를 주제연구 했다. 졸업후 퀸즈 플러싱 IS 25 특수반 교사, 뉴타운 고등학교 교사로 정신장애로 심리적 안정이 필요한 학생들을 상담 지도했다.
“정서불안으로 인한 문제아들을 정상아로 사회 적응시키는 일에 열정을 갖고 일했고 보람이 있었다. 처음 내 영어발음이 서툴다고 웃던 미국 청소년 아이들에 스트레스를 받았으나 아이들이 마음을 열었고 나중엔 그들이 귀여웠다. ”
미국 청소년교육을 하면서 한인2세들의 민족 교육을 시키고 싶다는 생각을 한 천취자는 당시 뉴욕한인교협이 창설되면서 한인교회에서 강의하면서 그 기회가 왔다. 자연스레 뉴욕한인청소년기관 교육 및 가정상담을 맡게 되었다.
뉴욕한국일보를 비롯 로칼 신문에 본격적으로 교육칼럼과 수필을 썼고 청소년 문제 상담가로 뉴욕과 뉴저지 강단에 서게 되었다. 2000년 뉴저지한인청소년 센터 주최 ‘청소년 폭력의 심각성과 대책’ 특별세미나에서 그는 “부모가 함께 자녀문제를 책임져야 한다. 부모의 무관심이 아이의 학교 결석 원인이 된다”며 조기 유학의 문제점을 예를 들어 강연하기도 했다.
교직생활을 하면서 주말에는 뉴욕한성학교 교장, 뉴욕신광한국학교 교장, 신광유치원 원장 등을 20년이상 지냈다 제21차 재미한인학교 교협 학술대회에서 20년 장기근속교사상(신광한국학교 교사)도 받았다.
“미국에 와서 공부하고 결혼하고 자녀들을 키우면서 한국어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않았다. 그래서 2세 교육과 봉사에 헌신할 수 있었다” 숫기 없이 늘 뒤에서 조용히 있을 것처럼 말소리도 나직나직한 천취자는 봉사활동을 하면서 앞으로 나서게 되었고 일단 책임자의 위치에 서면 누구보다 열심히 해내는 추진력과 기동성을 보여주었다.
2009년 미주한인여성네트워크 창립6주년 연례만찬에는 역대 회장으로서 가장 많은 기금을 모았을 정도다. 2010년에는 숙대미주총동창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현재 미동부한국문인협회, 한미현대예술협회, 미국시인협회와 국제펜클럽 회원으로 활동해 오며 이웃봉사를 쉬지 않는 그에게 지난 1월 31일 낫소카운티 정부는 청사 기념관에서 연 ‘제1회 설날 행사’에서 ‘올해의 한인’상을 수여했다.
●가장 귀한 아이들 작품
천취자는 60년에 미국 유학 온 신경 X-레이 전문의인 김승억씨와의 사이에 2녀를 두었고 큰딸은 심장과 의사, 작은딸은 수학 교사이다. 딸이 유치원에 다닐 때 그린 그림을 보고 그가 쓴 ‘형태없는 그림’이란 시에 딸 사랑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교실 벽에 형태도 없는 그림/ 그 속에는 딸의 손길이 묻어 있었다/ 머리는 있고 손발이 제멋대로 달려 있는 유치원 소녀의 작품이었다/ 딸의 향기가 묻어있는/ 색깔과 기교에는/ 창조의 의지가 담겨있고/ 세계의 일류화가/ 피카소 그림보다/ 더욱 걸작품이었다’
천취자는 아이들이 어린 시절 학교에서 그린 그림, 엄마에게 준 글 등 모든 작품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보물로 간직하고 있다.무엇 하나 소홀하게 취급하지 않는 그의 마음이 이민 1세나 2세들에게 정신적 토대가 될 문화 공간을 마련하고 예술을 통한 한국의 민족정신을 심어주고 있는 것이다.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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