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선 (전 커네티컷한인회장)
일주일 사이에 두어 차례의 눈 폭풍이 자나가더니 마을은 온통 눈 속에 파묻힌 동화의 나라가 되었다. 역시 벌써 겨울이 물러가기를 기대하기에는 성급했다
살면서 마주하는 일들이 어쩌면 모두 특별한 것이겠지만 겨우 휴일에야 시간을 낼 수 있는 이민자의 생활은 늘 바쁘기만 하다. 지난주에는 생일을 맞는 큰아이와 중요한 시험을 끝낸 작은아이가 있는 뉴욕과 보스턴을 오가느라 한 주일이 더 짧게 느껴졌다. 폭풍 같은 시간 속에 한국의 설이 그 한가운데 있었다.
명절 즈음 한국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것은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작은 즐거움이다. 때마침 상영하는 한국영화가 있어 아내와 함께 장모님을 모시고 ‘수상한 그녀’를 관람했다. 아들 자랑을 유일한 낙으로 사는 괴팍한 욕쟁이 할머니 오말순(나문희분) 이 꽃처럼 예뻤던 20대 오두리 (심은경 분)로 돌아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영화였다. 과거로 돌아간다는 설정은 간혹 영화화된 주제였고, 특별히 슬픈 장면이 나오는 것도 아니었지만 나는 주인공 오말순에게서 내 어머니를 떠올리며 나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닦고 있었다.
모든 걸 희생하며 키웠던 아들은 다름 아닌 우리였고 또한 나였다. 요양원으로 보내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 실의에 빠진 오말순은 곧 우리 어머니였다. 우리는 그런 어머니를 비록 한 공간에 모시고 있을지라도 무관심이라는 외딴섬으로 밀어내는 영화 속 아들이었던 것이다.
나는 실제로도 어머니의 꿈이 무엇이었는지 알지 못한다. 어머니의 꿈을 알려고도 하지 않았고 물어본 적도 없다. 어릴 때의 생각이었지만 어머니는 그냥 처음부터 어머니가 되려고 태어난 분이라고 여겼던듯하다. 어머니의 여학교 시절 모습이 궁금했던 적도 없었고,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을 받았던 젊은 여인으로서의 모습은 상상해 보지도 않았었다. 한때 어머니가 아버지를 도와 살림을 일으킬 때에도 어머니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역할 중 하나라고만 생각했었다. 어머니니까…
영화를 보는 내내 ‘당신은 언제로 돌아가고 싶은가’ 끊임없이 묻는 듯 했다. TV 프로그램에 출연한 한 여배우는 ‘혼돈과 고난’의 20대 청춘을 다시 여행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과연 나는 내 나이의 어디쯤으로 돌아가고 싶은 걸까?
얼마 전에는 아내가 장모님을 모시고 겨울 여행을 떠났었다. 유별나게 추운 날씨에 더 추운 곳으로 떠나는 여행이 걱정스러웠지만 어린아이처럼 들떠 짐을 꾸리는 두 모녀의 모습을 보며 말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아내가 여행 중에 간간히 보내오는 사진 속 모녀의 모습을 보며 두 사람이 함께하며 얼마나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사나흘 불과한 여행이 먼 훗날 아내가 그토록 그리워하며 기억하는 순간이 되리라 생각하니 왜 진작 그런 시간을 좀 더 많이 만들어 주지 못했는지 후회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이 세상에 계시지 않은 나의 어머니를 떠올리며 생전에 여동생들과 함께 여행을 떠날 수 있도록 해드렸더라면 서로에게 큰 선물이 되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어 얼마나 부러웠던지.
평생을 누구의 아내로만, 또는 누구의 어머니로만 존재했던 내 어머니의 삶에 나는 오늘 머리 숙여 절을 한다. 그 시대의 어머니들이 모두 그러했다 할지라도 숨 가쁘게 살아온 그분의 일생이 마냥 안쓰러운 건 어머니에 대한 살아있는 자식의 회한이다. 영화 ‘수상한 그녀’는 아무 말도 자식들에게 남기지 못한 채 떠나간 어머니를 ‘청춘사진관’에 모시고 가 기억하게 해 주었다.
이국땅에서 맞이하는 명절은 가슴이 시리다. 그리움은 이렇게 늘 등 뒤에 있어서 자꾸 되돌아보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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