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상인 문제=먹고사는 문제, 발벗고 나서야죠”
▶ 교수자리 박차고 한인소상인들의 대부로 30여년
<사진 천지훈 기자>
‘소기업이 있는 곳에 김성수가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수십년간 한인자영업자들을 위해 일하고 있는 김성수 뉴욕한인소기업센터 소장. 청과협회 일을 하며 한인사회가 한마음 한뜻이 되는데 구심점이 되기도 했다.
●이민 1세들의 위기
“지난 20년동안 뉴욕시의 38만명 스토어 오너가 장사를 접었다. 작년에만 24%의 소기업이 문을 닫았다. 자영업자 80%가 영어 못하는 이민자들인데 이들이 뉴욕시를 떠나고 있다. 뉴욕 시정부의 소상인 정책이 잘못된 것이다.”
미국의 생산성이 내리막길인데다 뉴욕시 정부가 개입하여 남발하는 티켓은 비즈니스 경비가 아닌 실질적 임금에서 추가 지출되니 소상인들이 점점 힘들어지는 것이다.
“뉴욕에 1만5,000(9,500개)개의 소기업, 이 중 50여 업종에 집중되어 있다. 거기에 18만5,000명이 종사하고 있다.” “40~50대 한인 1세들의 위기이다. 앞으로 20년을 더 장사해야 먹고 사는데 렌트를 못내고 노사 문제, 과도한 티켓 등으로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 가장 먼저 먹고 사는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
그래서 김성수는 얻어터지고 맞으며 풍차를 향해 돌진하던 ‘돈 키호테’처럼 불가능 하지만 무적의 적수를 이기고 이상을 실현하려 한다.“정부에 더 이상 기대 안한다. 소상인연합회가 더욱 활발히 움직여서 총회에서 정식으로 시청에 렌트 인상, 과도한 티켓, 소상인 교육, 대화 창구 등 정당한 대접을 요구하고 시위도 할 것이다.”
그는 1991년 소상인연합회가 결성, 13만 뉴욕 소상인 124개 단체 회원 중 7개가 한인단체였는데 초대 회장부터 지금도 그가 회장이다. 회원 2,500명, 이 중1,000~2,000명이 활동 중이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소기업 투쟁 수십년 동안 김성수는 뉴욕 시청을 수없이 갔다. 본인 혼자도 하고 한인, 중국인 청과 및 델리 업주들과 단체 시위도 수없이 주도하며 소상인 이슈로 참여한 법안만 60건, 2,700건의 한인 가게 문제를 해결했다.
교통국 직원의 횡포, 좌대 강화 규정 시의원 상대로 반대서신 보내기, 전화 걸기, 개별 접촉을 통한 로비 등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온 그의 별명은 ‘데모꾼’, ‘쌈꾼‘, ‘워커홀릭‘, ‘돈 키호테‘.....뉴욕시장, 감사원장, 공익옹호관, 보로장 등 고위직 도전 후보들과 시의원들은 그를 무시 못한다. 정치인 중에는 김성수라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드는 이도 있다. 1979년부터 4년간 청과상조회 봉사실장으로서 일할 때 데일리 뉴스 프론트 페이지에 ‘새이민 집단의 대표‘로 그의 기사가 나기도 했다.
김성수는 1985년 3월23일 뉴욕한인소기업 센터를 설립, 뉴욕시장 후보들을 초청 상가 렌트 안정을 이슈로 공청회를 개최하고 1988년 뉴욕주 네일 면허제도가 시행될 때는 네일협회 관계자들과 올바니를 30번이나 올라가 결국 주정부로부터 경력자에게 라이선스를 주는 혜택을 받아냈다.
그가 뉴욕 소상인을 살린 가장 큰 일은 1996년부터 2년반 계속 되었던 메가 스토어법 저지다. 김성수는 메가 스토어법 저지는 뉴욕시 자영업을 살려 새 이민자의 설움을 달랬다.
대형 마켓의 뉴욕시 진출 저지를 위해 시의원을 찾아 동네, 동네마다 밤 9시도 불사하고 찾아가고 로비한 결과 47대 1이라는 역사적인 기록으로 승리한 일이다. 47대 1로 소기업이 승리한 이 날, 뉴욕 시티홀 커뮤니티 의회에 참여한 시의원들은 김성수를 헹가래 쳤다. 주요언론들은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서 다윗 김성수가 승리했다고 보도했다.
데이빗 딘킨슨 뉴욕시장 시절 김성수는 시장실 산하 소상인정책자문위원회 의장을 지내며 스몰비즈니스 소상인 21개 보호조항을 실시했다.
“1989년 각종 티켓을 받은 한인업체에 대한 사면 계획을 신청하여 원금만 내고 사면을 받는 조치를 받아냈고 1992년에는 청과 좌대도 최고 5피트 늘어나는 등 소상인들의 천국이었다. 소상인을 위한 응급펀드도 만들었다.”
소비자국 국장이나 관청 직원들이 김성수에게 먼저 인사하던 호시절은 딘킨스 시장 4년이 지나고 루돌프 줄리아니 시장 취임 2년 만에 그 자리를 물러나야 했고 조직이 해체되었다. 티켓이 발부되지 않으니 뉴욕 시 재정이 바닥날 지경이었던 것이다.
2005년 좌대 규정강화 법안 저지를 위해 한인청과협회, 식품협회와 법안 무료화 투쟁, 2010년 상가렌트조정 조례안 법안 재상정, 한인 업주들과 히스패닉 종업원들간의 분쟁, 한인업소 간판 상호 단속, 불법 그린 카트 규정 수시 변경, 가격표 부착, 미용, 네일, 세탁업 등 카드결제 환불교환, 업소 규정 등등 일이 터질 때마다 그의 힘이 미치지 않은 적이 없다.
●소상인 있는 곳에 그가 있다
김성수는 1940년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원불교 사원 27개를 지어 ‘김성수’라는 이름을 붙여 기증할 정도로 아버지 김종권씨의 깊은 사랑을 받고 성장했다. 서울대, 서울대학원 정치학과, 버지니아대 정치학 석사를 마친 그는 모교 전임강사가 되었다.
“1970년대초 유신 시절, 교수가 학생들을 감시하는 역할에 회의를 느끼다가 1974년 풀브라이트 장학금으로 다시 뉴욕에 와 컬럼비아대에서 정치학 박사를 했다. 한국 이민자들의 정치의식에 대해 논문을 준비하면서 대상을 한인 청과인으로, 인연을 맺은 것이 시작이다.”
1979년부터 4년간 청과협회 사무총장으로 일하면서 그들의 고충을 피부로 느꼈다.
“새벽에 시장에 물건을 하러 나온 한인 청과인들이 걸핏하면 강도를 당해도 보호받을 방법이 없었다. 한번은 화장실에서 강도에서 지갑을 물론 옷까지 다 뺏겨 발가벗은 청과인이 실장님 하면서 발견된 적도 있다. 매일 이렇게 강도를 당하고 경찰한테 보호도 못받는 한인들을 보고 더 이상 못참겠다 우리가 힘을 모으자 했다”
김성수는 뉴욕시장, 검찰청, 경찰에 14개 조건을 내걸었다. 도매 시장 출입자에게 ID을 만들어 치안 및 안정을 도모 했고 처음으로 시장 안에 권총을 찬 경비원을 상주시켰다. 청과회원 680명에게 회비 100달러씩을 걷으니 6만8,000달러가 되는 기금이 만들어졌다. 또 권총 든 강도 사건에 대해 항의하며 처음 5만9,000달러의 정부 돈도 받아냈다.
이렇게 손에 든 책을 던지고 교수 자리에서 스스로 내려와 소상인들의 생존을 위해 일해온 그는 1982년 새벽시장에서 3피트 장총과 권총을 들고 캐딜락 타고 도망가는 강도들을 경찰 한 명과 함께 작은 차로 들이받아 검거한 일도 있다.
‘굿 사마리탄’, ‘벤자민 워드’ 상, ‘용감한 시민상’ 등 상만 80개 이상이다. 이러니 ‘김성수’ 이름 석자를 뉴욕시 경찰, 시정부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세를 탔다.
김성수는 2년전 병으로 세상을 떠난 부인 이선덕의 임종 자리에서 ‘하나님께 갈게’ 약속했다고 한다. 요즘 겸손하자, 허영을 버리자, 범사에 감사하자며 기도 속에 살고 있다. 아들 김영린은 의사이자 의대 교수며 손자 둘을 두었다. 짱짱한 학벌에 유창한 영어, 거침없이 나오는 언변, 불가능한 꿈을 실현시킨, 김성수는 소상인을 위해 평생을 바친 댓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
잘 나가던 시절인 90년부터 98년까지 직원 9명, 넓은 사무실, 1년 10만명 회원의 규모를 지닌 소기업센터는 1997년 메가스토어 저지 법안 통과를 이뤄낸 후 허리케인급 후폭풍을 고스란히 맞았다. 1년예산 70만달러 중 40만달러를 후원하던 대기업의 기부금이 끊어진 것이다. 직원 2명, 좁은 사무실에 저널리스트 부인이 미국직장을 그만두고 일을 도우러 사무실에 나오기도 했다.
오늘까지 그 후유증을 앓고 있지만 여전히 김성수는 하고싶은 말 다 하고, 하고싶은 일을 하면서 살 작정이다. 어찌보면 한인 커뮤니티가 그에게 갚을 수 없는 빚을 졌는데 “소기업센터를 돕는 100인 후원회가 결성되어 기금을 보내주고 있다, 한인 커뮤니티가 고맙다”고 말한다.
“부끄럼 없는 소상인이 되기 위해서 자신을 갖고 싸우자. 시민그룹과 연합을 만들어 우리 주장을 펼쳐야 한다. 정치인들에게 내 주장을 받아들이게 하자면 첫째 명분이 있어야 한다, 또 실례를 들어 정부와 대적해 싸워야 한다.”
작년에 이어 한인소상인을 대상으로 한 세미나를 올해에도 열 것이며 현재 그는 2~3년에 걸쳐 ‘뉴욕시의 청과 공공정책’에 대한 책을 쓰고 있다.봄을 맞아 김성수는 다시 난공불락인 성을 향해 전진의 나팔 소리 없어도 종횡무진 칼을 휘두르며 진격할 채비를 갖추었다. 그의 재활약이 기대된다.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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