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갑헌 (맨체스터대 철학교수)
몇 주 전에 프린스 이고르 (Prince Igor)라는 오페라를 보러 갔었다. 러시아인들의 민족주의 정서가 진하게 배어있는 작품이었다. 12,3세기에 쓰여진 서사시를 오페라화 한 것이라고 한다. 러시아가 작은 공국으로 분열되어 있던 12,3세기 러시아는 다른 민족의 지배와 침략에 시달리던 시대였다. 이고르가 대군을 이끌고 흑해 지방을 지배하던 타타르 계통 콘챡 칸을 공격하다가 전쟁에 패하여 포로가 되는 것이 이 오페라의 역사적 배경이다. 지리적으로 보면 오늘 우크라이나를 동서 둘로 가르는 드녜프르 강과 러시아 남부의 돈 강 사이 흑토지대 대평원이 그 무대이다.
오페라의 많은 부분이 포로가 된 이고르의 심리적 갈등을 묘사하는 것으로 채워져 있다. 피가 흐르는 듯 붉은 양귀비꽃으로 뒤덮여있는 언덕과 그 속에 쓰러져 번민하는 이고르의 실존적 갈등이, 내부에서 일어나는 분열과 반란 그리고 외부에서 밀려오는 이민족의 침략이라는 두 구도에서 조명되고 있다. 포로에서 돌아온 이고르가 폐허가 된 러시아를 돌아보고, 재건된 러시아, 단결된 러시아를 꿈꾸며 새 시대를 열어가는 것이 이 오페라의 결론이다. 러시아인들의 심리적 내면에 존재하는 외부세계 특히 서방세계에 대한 의심과 불안감의 뿌리를 환하게 드려다 보는 듯 했다.
러시아가 다시 뉴스의 중심에 서있다. 우크라이나의 친 러시아계 정권이 서부 우크라이나인들의 저항으로 무너지고 친서방 정파들이 임시정부를 수립하자 러시아계 인구가 다수인 동부지방 특히 크리미아 반도의 러시아인들이 우크라이나에서 독립하여 러시아에 귀속하겠다고 선언했다. 러시아는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크리미아 뿐 아니라 드녜프르강 이동의 러시아계 우크라이나인들을 보호 하겠다고 나섰고, 미국을 비롯한 서구의 열강들은 러시아의 정책을 침략으로 규정하고 이를 강력히 제재하겠다고 나섰다.
아직 무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무리수는 보이지 않으나 외교적 공방과 거친 언어들이 우리를 어지럽게 한다. 침략이라는 주장과 러시아 민족의 자결권을 보호하겠다는 주장 사이에서 느끼는 거리감과 괴리감의 뿌리는 아마도 프린스 이고르의 번민과 19세기 영국 프랑스의 침공으로 벌어졌던 크리미아 전쟁의 원인 속에서 찾아야 할 듯 하다.
갈등의 중심에 있는 그 곳의 여러 지명과 역사적 사건들이 전혀 낯설지 않다. 세바스토폴, 크리미아 전쟁, 나이팅게일, 경(輕)여단의 돌격(알렉 기네스 역), 키예프, 드녜프르, 노벨 문학상을 받았던 ‘고요히 흐르는 돈 강’, 우크라이나 타타르족의 지도자였던 대장 부리바 (율 브리너 역), 적국의 공주를 사랑해서 민족을 배반 했던 부리바의 아들(토니 커티스 역)과 아들을 친히 죽여야 했던 아버지, 그리고…… 적국의 공주와 사랑에 빠진 아들을 포기하고 홀로 절망적인 탈출을 감행해야 했던 프린스 이고르. 왜 그런지 그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남의 일 같이 느껴지지 않는다.
현란한 외교전쟁의 언어에서 형용사 부사를 다 제외하고 난 후, 러시아의 주장과 서구 열강의 주장을 주의 깊게 들어보면,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러시아의 주장이 더 타당성 있어 보인다. 정신적 심리적으로 이 지역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신성한 모국’ 러시아의 땅이었다. 크리미아 의회가 선언한 자결권과 독립이 불법이라는 서방의 주장은, 코소보의 자결권과 독립을 지지하고 세르비아를 폭격 했던 자신들의 최근 행적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모순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러시아의 주장이 불법이라면, 미국과 서방 열강의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침공, 그리고 최근 리비아 반군을 지원하기 위해 가다피 정부군을 무차별 폭격한 것이나 반란군 지원을 위해 시리아를 폭격 하려던 오바마의 실패한 정책들은 다 국제법이 허용한 것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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