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선<전 커네티컷한인회장)>
지난겨울에는 사흘이 멀다 하고 눈이 내렸었다. 마을은 겨우내 온전히 눈에 갇혀 있었다. 답답하고 지루하던 시간을 뒤로하고 모처럼 햇살을 따라 거리로 나섰다.
언젠가 한번쯤은 들렸던 중국 식당은 문을 닫았고, 그 옆자리에는 새로운 리커스토어가 생겼다. 도로 건너편으로는 지난해 가을 녘에 문을 연 이탈리안 식당의 빛바랜 그랜드 오프닝 현수막이 눈에 들어왔다. 그 옆으로 폐업을 알리는 옷가게의 80% 세일 사인이 이탈리안 식당의 현수막과 함께 때마침 부는 바람에 펄럭이며 눈길을 끈다.
샤핑몰 주차장 한쪽 구석에는 아직 채 녹지 않은 눈이 화석처럼 시커멓게 군데군데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시베리아 폭설에 발이 묶인 히틀러의 전차 군단을 연상케 했다. 탄생과 소멸은 동전의 양면처럼 늘 함께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은 옷깃 속으로 파고드는 차가운 바람에 익숙해지지 않았지만 어지럽던 머릿속은 한결 맑아졌다.
거리에서 만난 여인들은 다소 얇아진 옷을 차려입고 서둘러 봄을 맞이하러 나와 있었다. 쇼윈도의 그녀들도 화려한 봄 빛깔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두툼하고 칙칙한 외투에 몸을 숨긴 이들이 언 손을 녹여가며 얼어붙은 길목을 치우고 있었다. 봄은 그렇게 거리에서부터 오고 있었다.
그로서리에도 봄은 와 있었다. 봄을 알리는 꽃들 앞에서 사람들은 행복을 꿈꾸며 어떤 이는 사랑을, 또 다른 이는 소망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나는 활짝 핀 노란 수선화 화분을 골랐다. 만개한 꽃대 옆에는 이제 갓 핀 어린 꽃대가 숨어 있었다. 키 큰 녀석을 잘라주면 작은 녀석이 커가는 모습을 담을 수 있겠지만, 작은 녀석을 잘라주면 이제 만개한 키 큰 녀석을 두고두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전지가위를 쥐었다가 놓기를 반복하는 사이 창으로는 그 짧은 해가 진다. 오늘 하루만 더 생각해 볼 일이다.
주일미사 후 국도를 따라 내려오며 발길 닿는 곳에 서고 멈추기를 거듭하다 강물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차를 세웠다. 얼어붙은 강을 바라보며 봄볕이 물길을 터주기를 기대해 보기도 했다. 자주 가던 인근의 바닷가에 도착했을 때 일몰을 담으려는 일군의 무리들이 카메라를 받쳐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일주일 사이 바다 끝에서 붉은 빛으로 찰랑이는 봄빛을 보았다.
3월 13일자 한국일보의 하루는 다음과 같다. 맨하탄 아파트 2채 폭발 붕괴… 70여명 사상, 뉴욕주 ‘동해 법안’ 첫 관문 통과, 특목고 합격 53%아시안, “ 공항의 선한 사마리아인” 공항 채플 목회자들, “올해는 꼭 그랜드슬램 달성” …. 큰 활자만으로도 우리가 사는 세상을 유리창으로 들여다보듯 읽을 수 있었다. 내일은 또 다른 소식이 지면을 장식할 것이고, 어제의 뉴스는 어느 날 사라지던가 일상으로 묻히게 될 것이다. 날마다 일어나는 일들에 적당히 적응하고 타협하고. 때론 순응하고 이해하며 오늘을 살고 있는 것이다.
경계는 늘 마음 한편으로 부는 저무는 가을바람처럼 때로는 쓸쓸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 경계가 두려움을 깨는 소생하는 설레임이고, 호기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은 얇은 옷의 여자와 두툼한 외투에 몸을 숨긴 남자가 함께 하는 공간에서 찍은 한 컷의 사진 같은 모습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를 현재의 나로 있게 한 시간들에도 경계는 있었다. 나를 변화시킨 계기는 분명 있을 테지만 그것을 결정하고 선택한 것은 나의 판단이었을 것이다. 모호한 경계를 넘나들며 혼돈의 세월을 보냈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 왔다고 생각한다. 비록 살아낸 세월이 무채색 일지라도 내가 한걸음씩 뚜벅뚜벅 걸어오게 이끌어준 힘에 감사한다.
그렇게 겨울은 끝나가고 봄은 오고 있었다. 조금은 혼란스럽지만 햇살은 봄이라고 이름하고 싶은 날이었다. 나무도 정성껏 새순을 내밀 것이다. 적당히 새 날을 맞을 수는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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