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에게 장애는 도전일 뿐...불가능은 없죠”
김진숙(오른쪽) 약사와 남편 광균씨가 약장에 진열된 약을 정리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천지훈 기자>
흰 가운과 휠체어. 약국과 그 곳서 일하는 장애인 부부!
플러싱 제일약국의 김진숙(60)약사는 휠체어를 타고 생활하는 소아마비 장애 여성이다. 그 곁에서 약국을 운영하는 남편 김광균(67)씨도 같은 장애로 휠체어에 앉아 일을 하고 있다. 이들 부부는 약국이 좁은 공간이라 휠체어를 타고 일하자면 거치적거릴 거라는 생각과 달리 전혀 불편 없이 일을 하고 있었다.
김 약사는 처방전을 갖고 오는 환자들의 각종 약을 조제하는 일과 복용방법 등 약에 관한 각종 상담을 하고 있다. 남편 광균씨는 일반의약품 판매, 노인환자를 위한 메디케어, 메디케이드 등 서류작업 봉사와 약국 운영에 관한 제반 업무를 도맡아 하고 있다. 이들 부부는 “우리 약국을 찾는 환자들은 대부분이 나이 많은 어르신들이 단골이기 때문에 가족의 건강을 챙기는 마음으로 일하고 있다”고 말한다.
■ 소아마비 장애인 약사 부부
5월17일 김 약사 부부를 만나기로 한 날. 그들이 어떤 모습으로 일할지 무척 궁금했다. 약국에 들어서자 좌우에 약품 진열대를 조금 지나 카운터에 앉아 있는 남편 광균씨가 먼저 보인다. 인사를 하러 다가가니 휠체어에 앉은 그가 반갑게 맞아준다. 카운터 뒤 조제실에서 일하던 김 약사도 검은 의자에 앉은 채로 카운터로 다가와 ‘어서 오세요’라고 인사를 건넨다. 검은 의자 아래는 이동하기 편하게 둥근 바퀴가 달려 있었다. 김 약사는 하얀 얼굴에 안경을 쓴 지적이미지를 풍기는 단정한 외모가 광균씨는 넉넉한 풍채에 까무잡잡하면서도 마음씨 좋은 아저씨 같은 편한 얼굴에 웃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 환자들 아픔 아는 약사
이들 부부가 약국을 시작한 것은 1996년. 이름은 제일약국으로 정했다, 환자들의 건강을 제일로 생각하고, 환자들을 위한 서비스도 제일로 잘하는 약국으로 만들고 싶어서다. 약국 개업 초창기에는 휠체어에 앉아 일하는 이들 부부를 보고 의아해하는 환자들이 종종 있었다. 혹자는 말은 안 해도 아픈 약사를 껄끄러워 하거나 동정하는 표정을 짓기도 했다. 이때마다 이들 부부는 “환자들의 건강을 제일로 생각하자는 초심을 잃지 말자”며 서로의 손을 꼭 잡아주며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다 보니 약국을 찾는 환자들의 마음도 열리기 시작했다. 오히려 “약사도 아픔이 있으니 내 아픔을 더 잘 알아줄 것”이라는 기대감도 엿볼 수 있었다. ‘식사는 했는지, 잠은 잘 잤는지, 일요일 하루는 잘 쉬었는지’ 등의 일상적인 질문을 주고받으며 이들 부부와 약국을 찾는 환자들은 어느 새 ‘한편’이 되어 갔다. “약국에서 일하는 데 신체적 불편으로 인해 어려운 점은 없다”는 이들 부부는 “몸이 불편해 환자들이 사려는 일반 약품을 직접 못 집어다 주는 미안함을 늘 가슴속 깊이 간직하고 있다”며 그래서 더욱 변함없이 약국을 찾아주는 환자들에게 감사함을 느낀다고 말한다.
■ 안부 챙기고 김치 담가오고...가족같은 환자들
약국을 오픈한지 18년의 세월이 흐르다 보니 무수히 많은 사연들도 쌓였다. “오래 전 일이긴 하지만 항생제를 사러 온 환자에게 ‘처방전 없이는 약을 판매할 수 없다’고 하자, 대뜸 ‘병신 육갑떨고 있네’라는 욕설을 퍼붓고는 약국을 나간 환자가 있었다”며 이들 부부는 처방전 없이는 약을 판매하지 않는다는 철칙으로 오히려 어이없는 수모를 당한 사연을 조심스레 털어 놓았다.
이들 부부는 보행의 자유는 잃었지만 약국을 찾는 환자의 90%를 차지하고 있는 나이 많은 노인들을 접하다 보니 부모를 모시는 가정을 이끌어 가는 마음으로 약국을 운영하고 있다. 그러기에 약국을 찾던 노인들이 세상을 떠나는 잦은 이별을 맞아야 하는 이들 부부는 남들보다 더 많은 슬픔을 견디며 살아가고 있다. 평소에 김치도 담가주시고,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꼭 건네는 부모 같은 분들의 사망에 며칠 더 사실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던 일은 없었을까하며 늘 무거운 마음으로 살고 있다고 귀띔한다.
알츠하이머로 약국을 왔다 집을 못 찾아간 노인들을 찾아 집으로 직접 모셔다 드린 기억, 혈압, 당료로 너무 많은 약을 남용하는 노인들에게 원인을 찾아주는 상담을 통해 노인들이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겨 고맙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가 이들 부부에게는 보람이었다고 입을 모은다.
■ 약사화 미대 졸업생으로 첫 만남
1954년 경남진해에서 해군장군의 딸로 태어난 김 약사는 한국에서 1997년 약대를 졸업하고 바로 ‘두별 약국’을 개업한 뒤 장애인 봉사 모임에서 1947년 서울서 태어나 미대를 졸업하고 미술을 가르치고 있던 광균씨와 첫 인연을 맺었다. 그들은 광균씨의 미국 이민으로 이별의 아픔을 겪기도 했지만 7-8년의 세월이 흐른 뒤 한국에서 다시 재회해 결국 결혼에 골인했다. 그리고 1986년 결혼과 동시에 자신들의 삶을 개척하기 위해 미국 땅으로 이민을 선택했다.
컴퓨터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하던 광균씨와 3년 독학을 통해 약사 자격증을 취득한 김 약사는 1996년 이민 10년 만에 자신들이 꿈꾸던 ‘돈’보다는 ‘도움이 되는 일’을 하기 위해 약국을 직접 차리게 됐다. 그 후 18년이 지나는 현재까지 1년 365일 단 1분도 곁을 떠나지 않고 약국과 집을 오가며 자신들의 꿈을 실현해가고 있다. 몇 해 전 장인이 돌아가셨을 때 김 약사가 한국을 갔다 온 단 10일만이 결혼 후 첫 떨어짐 이었다고 한다.
■ 장애후배들 위해 아낌없는 지원
이민 28년 차인 이들 부부는 선천적으로 소아마비 장애를 갖고 있지만 ‘예측 불가능한 모든 상황을 도전으로 생각하다 보니 신체적 불편이 있어도 일상생활을 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다“고 말한다.
롱아일랜드 사이오셋에 살고 있는 주택을 개조해 휠체어를 타고 앉아서 생활할 뿐 정상인들과 별 다르지 않게 살고 있다는 이들 부부는 “긍정적인 사고로 주변의 이웃들과 어울려 살다보니 장보기, 집안 쓰레기 처리와 정원 눈치우기 등은 부탁하지 않아도 지인들이 알아서 척척 도와준다”며 “삶의 요령을 터득하다 보니 장애인이라고 느끼는 %가 훨씬 적어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런 이유로 피아노와 클라리넷 연주 솜씨가 빼어난 김 약사와 트럼펫을 잘 부는 광균씨는 뉴욕의 아마추어들이 모인 브라스밴드의 멤버로도 함께 활동하고 있다.
한국에서 장애후배들을 위한 소아마비 약대여성 모임인 ‘겨자씨’의 창립멤버로 활약한 김약사와 1970년대 장애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대학 입학이 거부되는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앞장섰던 광균씨. 둘이 하나로 만난 그들 부부는 ‘아픈 사람이 아픈 마음을 안다’며 지금도 여전히 장애인들을 위한 일이라면 아낌없는 지원에 나서고 있다. 그들은 ‘우리 부부에게 장애는 평생 안고 갈 도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라며 장애는 ‘불가능‘이 아니기에 앞으로도 ‘우리 부부의 도전‘은 계속 이어질 것이라고 다짐한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는 무한한 도전을 꿈꾸는 장애인 부부의 진한 향기의 사랑이야기가 담긴 영화한편을 보고 나오는 기분이 들었다.<연창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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