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선 <전 커네티컷한인회장>
영화 ‘명량’이 열흘 만에 관객 1,000만을 넘어 섰다는 뉴스를 본 것이 불과 며칠 전이었다. 그런데 날마다 ‘역대’ 가 들어가는 각종 신기록을 갈아치우더니 어느덧 1,5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극장으로 불러 모으며 흥행 돌풍을 이어가고 있다. 5,000만이 사는 대한민국 땅에 ‘명량’이라는 쓰나미가 덮친 것이다 세월호 참사를 겪으며 지도자와 국가 시스템의 부재에 국민 모두가 가졌던 절망감은 역사속의 영웅 ‘이순신’ 장군을 다시 불러내어 간절하게 해법을 묻고 있는 것이다.
임진왜란은 1592년 (임진년, 선조 25년)에 일어났다. 파죽지세로 밀려오는 왜군에게서 도읍을 방어하기 위해 신립이 탄금대에 배수진을 쳤으나 그나마 패전하고 전사함으로써 왕은 한양을 버리고 의주로 피난길에 올랐다. 왕이 도읍을 버렸다는 것은 나라, 즉 백성을 버렸다고 해도 옳았다. 가난하고 힘든 이들은 자기 자신을 지켜 내기조차 버거운 시절이었다.
사직을 위해 피난을 떠나기 보다는 백성을 위해 적을 막아섬이 옳았다. 백성을 담보로 전쟁을 할 수 없어 피난을 했다지만 왕이 버린 백성은 그렇다고 살아남은 것도 아니었다. 버려진 백성은 한낮 들풀만도 못되어 유린되고, 살아남았다 해도 짐승보다 못한 삶이 되었다. 그러나 백성을 버린 왕을 따라 의주 피난길을 함께 한 관료들이 있었다.
왕이 거처하는 곳마다 궁궐이요, 왕을 따르면 고관대작이 되었다. 나라가 송두리 채 유린당할 때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한 왕과 관료대신 목숨을 걸고 온몸으로 왜군을 막아낸 이가 장군 ‘이순신’이었다.
‘이순신’을 다시 읽었다. 장군은 백성 옆에 있었다. 아니 백성보다 한 걸음 앞서 있었고 늘 백성을 두 걸음 뒤에 남겨 두었다. 온갖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육신과 믿었던 사람에게까지 배반당한 그였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인간적인 고뇌보다는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를 생각했다. 그를 모함하고 시기하는 조정이 아니라, 백성을 뒤로하고 피난을 떠난 왕에 의해서가 아니라. 적에 의해 죽음을 당하는 장수로서의 영예스러운 죽음을 원했다. 장군은 ‘상유십이 미신불사(尙有十二 微臣不死)’ 라는 상소를 올리고 전장에 뛰어 들었다. 400여년이 지난 오늘, 나는 김훈의 글에서, 그리고 이문열’의 글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그리고 지난주에 그 영화 ‘명량’을 보았다.
영화에 대한 세간의 평가와는 별개로 영웅을 필요로 하는 시대와 영웅을 갖지 못한 우리에게 영화 ‘명량’은 숙제를 던져 주었다. 손바닥이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끝까지 노를 놓지 않는 격군들의 모습에서, 끝까지 목숨을 버리며 희생한 정탐꾼 ‘임준영’에게서, 장군의 배가 회오리에 휩쓸리고 있을 때 작은 목선에 나누어 타고 장군선을 구한 백성들의 모습을 통해 두려움을 용기로 바꾼 민초들의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이 암울한 시대에 우리 각자가 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지 묻고 있는 듯 했다. 영화감독이 주인공인 장군 ‘이순신’의 입을 통해 전한 ‘충(忠)은 임금이 아니라 백성을 향해야 한다’는 말은 오늘날 우리가 진정으로 듣고 싶은 말이기도 했으리라.
그리고 지난 14일, 그간의 절망과 슬픔으로 상처 난 땅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오셨다. 언제나 고통 받는 약자들부터 돌보며, ‘참된 권력은 섬김’ 이라고 말하는 ‘빈자의 교황’ 앞에 부끄러운 줄 모르고 우리 모두는 스스로 아픈 곳을 드러내며 위로 받고자 모여 들었다. 작은 차의 창문을 내리고 환하게 미소 지으며 화답하는 모습만으로도 치유가 되는 듯 열광했다. 사랑은 아래로 아래로 흘러 마침내 머무는 그곳이 성지가 되었다. 그가 남긴 메시지는 종교적 원칙에 충실하면서도 보편적이어서 세대와 종교를 떠나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불의한 힘에 대해서는 분노하고 단호한 질타를 가하는가 하면, 고통 받는 이들에게는 그 아픔을 함께 하며 진심어린 위로를 아끼지 않는 인간적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섰다. 사회적으로 예민한 문제에도 거침이 없었다. 특히 120일이 넘도록 참사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세월호 실종자들을 만나서 위로하는 모습을 보며 그들을 대신해 감사했다.
어린아이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각별한 애정은 방한 기간 내내 특별한 감동을 선물했다. 이제 그가 떠났으나 프란치스코 교황이 남긴 감동과 울림은 이제 우리가 받아 든 또 하나의 숙제가 되었다. 그동안 우리 스스로 잊었거나 외면했던 우리안의 약자들을 찾아 보듬으며 세대간, 지역 간. 계층 간 갈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우리 사회에 신뢰와 화해를 들여 놓을 때이다.
영화 ‘명량’과 교황 프란치스코에 열광했던 우리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희망을 쏘아 올리자. 이제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천천히 한걸음씩 내 딛자. 방향이 옳으면 언젠가 도달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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