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 리처드 피셔 달라스 연방준비은행 총재는 “지난 2008년 금융위기때 글로벌 금융 시스템이 붕괴직전으로 몰리면서 18개월간 단 하루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지만 벤 버냉키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은 더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회고했다.
당시 버냉키 의장을 고뇌에 빠뜨린 문제 가운데 하나는 월가 구제금융에 대한 대중들과 정치권의 불만이었다. 올 3월 버냉키 전 의장은 퇴임 후 첫 공개석상에서 “미 중산층들은 (금융위기를 촉발한 탐욕의) 월가 은행들만 구제하고 왜 나는 돕지않느냐고 물었다”며 “금융 시스템 붕괴를막는 게 미국인들의 삶도 방어하는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대중과 소통하기가 쉽지 않았다”고 토로했다.
버냉키는 자신의 표현대로 ‘홀가분한 개인생활’로 돌아갔지만 FRB의 딜레마는이제 재닛 옐런 의장의 고민거리로 등장했다. 옐런 의장이 최근 “미국사회의 소득과 빈부 격차가 100년 만에 최악으로 확대되면서 ‘기회의 평등’이라는 전통적 가치가 위협받고 있다”고 우려한 것이 단적인 사례다. 특히 그는 경제 불평등을 다뤄 ‘좌파의 아이콘’으로 떠오른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의 저서 ‘21세기 자본’까지 인용하며 “부와 빈곤의 대물림 현상이 심화하면서 미국의 계층 이동성이 낮아지고 있다”고 경고했다.
‘세계의 경제 대통령’인 FRB 의장이 보수주의자들의 맹공을 받는 피케티를 들먹이는 광경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일단 재정투입 여력이 바닥난 정부를 대신해 경제위기 극복의 최전선에 내몰린 각국 중앙은행장들의 고뇌를 보여준다. 각국 중앙은행들은 ‘교과서에는 있지만 역사적으로 효과가 증명이 안 된’ (버냉키의표현) 초저금리와 양적완화 정책이 어떤 부작용을 몰고 올지 내심 자신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양적완화의 경기부양 효과가 떨어지는 반면 주식·부동산 등 자산 거품을 키우며 부유층의 부만 늘고 있다는 비판도 거세다. 옐런 의장으로서도 후대의 평가를 감안해 미리 경고장을 날려놓을 필요성이 있었다는 얘기다. 실제 저금리 기조를 유지했던 앨런 그린스펀 전 의장의 경우 재임 당시 ‘신적인 존재’로 추앙받았지만 지금은 금융위기의 주범이라고 비판받고 있다.
하지만 옐런 의장의 발언에 대한 미 언론들의 평가는 후한 편이다.
그가 자신의 진보적 색깔을 드러내면서도 불평등 자체보다는 ‘기회의 평등’을 강조함으로써 정치적 논란을 피해 가는 노련함을 발휘한 것은 둘째 문제다. 무엇보다 FRB 의장의 권위를 이용해 사회 불평등 문제에 대한 공론화를 촉발했다는 것이다.
당장 보수주의자들은 히스패닉·러시아인 등 저소득층 이민자의 유입, 1인 가구 증가 등을 이유로 미국 내 빈부격차 심화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반면 진보주의자들은 “대졸자 평균임금이 2000년 이래 전혀 오르지 않는 등 교육을 통한 계층 상승 가능성이 줄고 있다”며 “부의 불평등 해결 없이는 기회의 평등도 불가능하다”고 반박하고 있다. 해결책에 대한 논의도 FRB 정책을 넘어 세제나 복지개혁등 정부 정책으로까지 확장되고 있다.
이는 빈부격차 논의 자체를 애써 외면하고 있는 한국과 대비된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최근 한국의 빈부 격차가 커졌지만 국제 수준과 비교하면 높은 것은 아니라고 밝혔다.
한국의 소득 불균형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내 상위권이라는 통계 등을 감안하면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된다. 최경환 경제팀 역시 시중 유동성을 확대해 소비·투자를 늘리고 경기를 부양하겠다는 청사진을 내놓고 있다. 여기까지는 미국·일본등의 경제정책과 별반 다르지 않다.
물론 저성장 국면 돌파를 위해 경기부양책이 불가피한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현 정부와 한은도 부동산 가격 급등, 가계부채증가 등으로 빈부 격차와 같은 부작용이 올 수 있다는 점을 외면하지만 말고 최소한 해결책 논의라도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버냉키 의장은 FRB 통화정책의 목표를 완전고용과 물가안정에 둔 이유는 결국 평범한 미국인에게 봉사하기 위해서라고 못 박았다. 요즘 쏟아지는 경기부양책 내용을 보면 궁극적 목표가 경제성장 자체인지 국민들 삶의 질 개선인지 헷갈려서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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