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년 한 우물’한인 최대 보험사 키워
▶ 상의 회장·이사장 등 봉사에도 활발
42년 역사를 자랑하는 ‘한미보험’을 한인사회 정상급 보험사로 키운 한문식 대표가 사무실에서 환한 미소를 짓고 있다. <박상혁 기자>
[초대석 - 한미보험 한문식 대표]
그는 항상 직원들을 먼저 생각하는 CEO로 통한다. 직원들의 노고가 있기에 회사가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지난 1980년 보험업계에 투신, 34년 동안 오로지 한 우물만 파며 42년 역사를 자랑하는 ‘한미보험’을 남가주 한인 커뮤니티를 대표하는 종합 보험사로 키운 한문식(65) 대표 얘기다. “지금까지 소극적인 선택만 하고 남의 도움을 받기만 하면서 살아 왔다”며 겸손한 마음을 전하는 한 대표는 남은 여생동안 ‘베푸는 삶’을 실천하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한다. LA 한인상공회의소 회장과 이사장, 한인보험협회 회장, LA 한인회 이사 등을 역임하며 커뮤니티 단체에도 깊숙이 관여한 그는 마음씨 좋은 이웃집 아저씨처럼 모나지 않고 소탈한 성격의 소유자로 보험업계 관계자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높다. 한 대표를 윌셔와 웨스턴에 위치한 한미보험 사무실에서 만나 그의 어제와 오늘,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들어봤다.
- 강산이 세 번 이상 변하는 동안 보험업에 종사해 왔다. 보험업을 선택한 계기는.
▲ ‘맨 트러스트’(Man Trust)라는 미국 은행 서울지점에서 수출입 업무를 담담하던 중 선진교육에 대한 열망 때문에 1980년 유학차 도미했다. 처음 LA 공항에 내렸을 당시 한미보험을 창업한 형이 나를 픽업하러 나왔고 이게 인연이 돼 자연스럽게 보험업에 발을 들여놓게 됐다.
버뱅크에 있는 우드베리(Woodbury) 칼리지에서 MBA 과정을 밟다가 중도에 학업을 포기한 뒤 곧바로 한미보험에 입사했고 5년 뒤인 1985년 대표 자리에 올랐다. 지금 생각해 보니 직업을 소극적으로 선택한 것 같다. (웃음)
- 보험에 대한 미주 한인들의 인식은 어떤가.
▲ 미국은 보험 없이 돌아가지 않는 사회이다. 내가 처음 보험업을 시작했을 당시 대부분의 한인들은 보험에 매우 소극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자영업자 중 커버리지가 약한 플랜에 가입한 사람이 많았다. 이 때문에 1992년 4.29 폭동 때 제대로 된 보험 커버리지가 없어 큰 피해를 본 한인 업주가 부지기수였다.
25~30년 전과 비교하면 보험에 대한 한인들의 인식은 많이 개선됐지만 아직도 일부 한인들은 보험 가입에 다소 소극적이며 어떻게든 보험료를 아끼려고 애쓴다. 보험에서 아끼려고 하지 말고 다른 분야의 지출을 줄이려고 노력해야 한다.
- 한미보험이 다른 보험사와 차별화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 ‘고객우선, 인재중시, 화합’이 사명이다. 한미보험은 1972년 창립돼 42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장수회사이다. 우리 회사에는 직원과 에이전트를 포함, 50여명의 직원이 근무하고 있다.
장기근속한 직원이 많기 때문에 꾸준한 서비스가 가능하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클레임과 관련된 문제가 발생한 적이 없을 정도로 높은 신뢰도를 자랑한다.
모든 분야를 총망라한 종합보험사이지만 사업체 보험, 상해보험, 자동차보험, 주택보험, 건강보험 분야가 특히 강하다. 직원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며 최고의 고객 서비스는 좋은 노사관계에서 시작한다는 믿음을 갖고 직원들이 회사의 주인이라는 인식을 심어주는데 주력한다.
- 보험회사를 경영하면서 여러 한인 커뮤니티 단체와도 인연을 맺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 지난 2004~2005년 제28대 LA 한인상공회의소 회장을 지내면서 현재 코리아타운 상징 조형물인 다울정 건립기금 모금을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녔던 일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한인단체 및 개인, 동문회, 은행, 마켓, 샤핑센터, 스몰 비즈니스 등 커뮤니티 전체가 한마음 한뜻으로 기금모금에 동참해 줘 다울정 건립이 현실화됐다. 내 인생에서 가장 보람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 한인사회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 일부 소수 인사들이 커뮤니티 대표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문제다. 능력과 자질을 겸비한 훌륭한 분들이 커뮤니티를 위해 봉사하려고 나서지 않고 있어 한인사회 입장에서는 큰 손실이다. 현재 한인타운에 단체가 너무 많고 끼리끼리 문화가 생겨나 큰 이슈가 불거졌을 때 커뮤니티의 응집력이 약할 수밖에 없다.
단체 구성원들이 모두에게 해악을 끼치는 편 가르기와 감투싸움을 자제하고 ‘내가 한인사회 발전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다.
- 회장과 이사장을 지낸 상공회의소에 특별한 애정이 있을 것 같은데.
▲ 1990년 상의에 입문, 부이사장, 부회장, 이사장, 회장을 두루 역임했다. 24년 동안 상의에 몸담으면서 상의와 함께 숨 쉬고 호흡해 왔다. 강산이 두 번 변하는 동안 상의는 외형적으로 크게 성장했고 지도부의 세대교체도 성공적으로 이뤘다.
하지만 구성원들의 가치관과 의식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단체활동과 운영이 멤버들의 비즈니스 발전과 개인이익 위주로 진행된다는 느낌을 받아 안타깝다. 모든 상의 회원·이사들이 진정한 봉사단체의 의미를 되새겨보고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 진정한 봉사단체로 재탄생하기를 기대한다.
- 좌우명이 있다면.
▲ ‘덕에 배부르고 의리에 취한다’는 의미를 지닌 ‘포덕취의’(飽德醉義)가 좌우명이다. 내가 겉으로는 얌전하고 내성적인 사람처럼 보이지만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하고 싶은 것은 다 하는 편이다. 친구들과 어울리며 허심탄회하게 대화하는 것을 좋아하고 적당한 음주도 즐긴다.
아이들이 어릴 때 “엄마, 아빠는 왜 안 싸워?”라고 종종 물어볼 정도로 아내와 심하게 다툰 적이 없다.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은행원이었고 아내는 영양사였는데 연애시절 내가 적극적으로 대시해서 결혼했는데 아내야말로 내 인생에서 유일한 ‘적극적‘ 선택이었다.
- 자식농사를 잘 지었을 것 같다.
▲ 우선 두 딸과 아들이 모두 가정을 꾸려 큰 짐 세 개는 덜었다. (웃음) 큰 딸은 한국에서 외국인학교 교사로 근무 중이고, 작은 딸은 상법·이민법 전문 변호사, 아들은 한미보험에서 일하고 있다. 아이들이 구김살 없이 잘 자라서 정말 행복하다.
- 앞으로 이루고 싶은 것은.
▲ 우선 한인 커뮤니티에 안주하지 않고 회사가 타민족 사회에도 진출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한인들만 상대로 비즈니스를 하면 언젠가는 한계에 봉착한다. 시야를 넓혀 타민족 사회에도 적극 진출하고 특정 분야의 전문성을 키우겠다. 이미 이를 위해 타인종 에이전트·직원을 고용했으며 타 커뮤니티 언론을 통한 회사 홍보도 병행하고 있다.
34년 전 미국 땅을 밟은 후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 여기까지 왔다. 소극적인 선택만 하고 살아왔기에 앞으로는 내가 가진 것을 소외된 이웃과 나누는 ‘베푸는 삶’을 살고 싶다.
<약력>
- 1949년 서울 태생
- 경복고
- 한국외대 법학과
- 1980년 도미, 한미보험 입사
- 1985년~현재 한미보험 대표
- LA 한인상공회의소 제28대 회장, 현 이사
- 미주한인보험협회 회장
- 한국외대미주동문연합회 회장
- LA 한인회 이사
- LA 평통위원
<구성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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