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둘 줄 아십니까”
1970년대 후반, 워싱턴 지역에는 한인(韓人)들의 인구가 많지 않았다. 워싱턴 주미대사관을 중심으로 메릴랜드, 버지니아의 광대한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한인들의 본격적인 이민이 그때까지만 해도 초창기여서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한국 사람끼리 만나는 것도 힘들었다. 어쩌다 샤핑센터나 모임장소에서 한인을 만나면 반가워서 서로 연락처를 주고받고 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면서도 대화가 오고가는 도중에 잊지 않고 물어보는 질문이 “바둑 두실 지 아십니까?”였다
어려운 초창기 이민시절에도 제일 반가운 건 바둑 동호인을 만나는 거였다. 이러다보니 바둑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소문이 나서 누가 바둑 잘 둔다는 사람이 있으면 만사불구하고 만나러 다니곤 했다.
-아파트를 기원으로 만든 고영일 고수
그러던 어느 날 매형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워싱턴의 최고 바둑고수를 찾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매형의 소개로 처음 만난 분이 고영일 씨다. 대학시절에 바둑부 대표선수란 말에 이래저래 족보를 따져보니 바둑도 학교도 대선배였다.
다짜고짜 바둑부터 한판하자는 소리에 찾아간 곳은 버지니아 알링턴의 허름한 아파트. 염치불고하고 들어서니 벌써부터 열성 바둑꾼들이 모여 있었다. 이렇게 해서 초창기 워싱턴 바둑 동호인회가 태동이 되었다.
당시는 기원도 없고 한국 교회도 없던 시절이다. 모두들 어려운 미국생활 속에서도 바둑에 대한 열정은 남달랐다고 생각된다. 특히 고영일 씨는 남다른 삶을 사시던 분으로 고향이 이북 황해도다. 어린 시절 1.4후퇴 때 부친과 단둘이 월남하여 모친과 형제를 이북에 두고 이산가족이 되신 분이다.
요즈음 영화 ‘국제시장’의 산증인이기도 하신 분이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 통치기인 엄혹한 시절에 미국에 사는 한국인 최초로 북한을 방문하여 모친과 형제들을 눈물로 상봉했다. 그의 이산가족 상봉은 화제가 되었으며 미국 언론에서도 대서특필되었다. 또 국제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많은 이산가족의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워싱턴의 고수들
워싱턴 바둑의 초창기 시절, 주말이면 모여서 바둑 두던 곳으로는 고영일 씨의 아파트와 알링턴에 있던, 정기용 씨가 발행하던 한민신보 사무실, 산부인과 의사인 이종수 씨의 메릴랜드 포토맥 자택을 들 수 있다.
당시 바둑고수라고 자부하던 바둑꾼을 살펴보면 메릴랜드대학 교환교수로 계시던 이호철(포항대 총장 역임), 고영일(자동차 정비업), 정기용(한민신보 발행인), 이종수(산부인과 의사), 이종석(에스콰이어 양복점), 강홍식(대사관 근무), 최창훈(부동산), 최성일 교수(작고), 김성봉(물리학박사, IBM근무), 강신억(개인사업) 씨 등등이다. 저마다 초창기 워싱턴 바둑 최고수라고 자부하며 바둑에 열성을 보이시던 분들이다. 이제는 고인이 되신 분도 있고, 아직도 기원에 열심히 바둑 두러 나오시는 분도 계시다.
워싱턴 산천은 의구(依舊)한데 인걸(人傑)은 간 곳 없네. 돌이켜보니 지나온 미국생활도 한판의 바둑 드라마 같은 인생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30년도 지난 이야기를 하다 보니 그 시절 감회가 새롭기만 하다.
필자: 풍운재 최환정(미국명 Charles Choi)
1975년 도미
미국바둑협회(AGA) 공인 7단
워싱턴바둑동호인회 회장
미 동부지역 바둑대회 우승(1985년)
워싱턴한인회 바둑대회 우승(1989년)
워싱턴 바둑왕전 우승(20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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