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후반이다. 지미 카터 대통령이 새로 워싱턴의 백악관에 입성한지 얼마 안 되던 시절이다. 한인끼리 모여 바둑을 둘 때면 서로의 기력(棋力)을 측정할 기준이 없었다. 초면에 만나서 “바둑 얼마나 두시나요?” 하고 물어보면 “글쎄요” 하며 우물쭈물 대답을 못 한다.
그러면 “1급 바둑하고 두어보셨어요” 라고 물어보게 된다. “네, 3점을 놓고 두었어요.” “5점을 깔고 두었습니다.” 등등 얘기가 나오면 대충 서로의 기력을 예측하고 대국을 하게 된다.
요즈음은 한국에도 아마추어 단(段) 제도가 생겨 공인도 하고 승단도 시켜주는 협회가 있지만 사실은 그런 제도가 보편화한 것은 일본이 먼저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미국사람은 바둑을 ‘GO’라고 하는데 이 말의 원뜻은 ‘기(바둑碁)’라는 한자를 일본식으로 발음하기 때문이다.
바둑은 서로의 치수가 엄격해서 대국 시 상수(上手)와 하수(下手)로 구분된다. 상수가 백돌을 가지고 두게 되는데 한 급에 한 점씩 선점하여 바둑 초보 입문이면 18급이다. 18급이면 1급 상수에게 흑으로 18점을 깔고 시작한다.
기력이 향상되면 치수가 조정되면서 중급수로 올라 갈 수 있다. 상수에게 바둑돌을 적게 깔고 둘수록 급수가 상향 조정되는 것이다.
당시 미국에서는 바둑돌과 제대로 된 바둑판 구하기가 쉽지가 않았다. 바둑판이라고 해도 나무 판대기에다 조잡하게 줄을 그어 사용했다.
그러다 누가 일본인 상점에서 일제 고급 바둑판을 판다고 하여 물어 찾아간 적이 있다. 바둑판 사러왔다고 하니 도대체 알아듣지를 못 한다. 손짓발짓으로 설명하다가 겨우 알게 됐다.
“아. 일본인들은 바둑을 GO(碁)라고 하는구나.”
그리고 미국인들과 일본인들이 어울려 바둑 두는 바둑클럽 ‘GO Club’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처음 찾아간 곳이 북버지니아 바둑 클럽(NOVA GO Club)이다. 금요일 저녁 늦은 시각인데도 미국 교회 넓은 방에서 많은 미국인 남녀가 바둑을 두고 있었다. 거기서 처음 만난 사람이 미국인 바둑 최고수(最高手) 알렌 에브램슨(Allen Abramson) 씨다.
일본에 유학 갔다가 배웠다는 바둑이라는데, 급수(級數)가 급이 아니라 4단(段)이란다. 나는 한국 바둑 1급이라고 하니까 그러면 규정대로 3점을 놓고 두어 보잖다. 그래서 흑돌을 잡고 석점 바둑을 두었다.
미국인과 최초의 바둑열전이 벌어진 것이다. 바둑 두던 미국인들이 모두들 몰려와 관전하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한국인과의 바둑 대국을 처음 보는 듯 했다. 한미 바둑대결은 의외로 너무나 싱겁게 흑의 승리로 끝났다.
알렌 씨가 다시 한 번 호선(互先, 대등하게 두는 방식)으로 두어보잖다. 두 번째 바둑대국도 일방적인 승부로 끝났다. 약간 멀쑥한 표정의 알렌 씨는 “한국 바둑이 일본보다 쎄다”면서, “너(You)는 1급이 아니다”라고 선언했다.
미국바둑협회(AGA) 5단으로 두란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얼떨결에 5단으로 인정받았다.
주위에서 관전하던 미국인들도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아마도 한국바둑이 쎄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됐을 것이다.
그 이후 AGA의 정식 회원이 되고 NOVA클럽의 바둑선수로 출전하여 AGA가 주최하는 미 동부지역 AGA 바둑대회에서 우승한 적이 있다.
2014년 한미국제바둑대회, 워싱턴 오픈 바둑대회에서 오랜만에 알렌 씨를 만났다. 지금은 미 전국에 100여개가 넘는 각 지역 AGA바둑클럽협회 회장으로 근무하고 있단다. 지난해 한미바둑협회 국제바둑대회도 그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고 한다.
본업이 학교 선생(조지 메이슨 대학교 강사)이었다고 알고 있다. 지금도 열심히 미국인 바둑교실을 열고 바둑 보급에 앞장서고 있다고 한다. 그의 끊임없는 바둑사랑과 바둑에 대한 열정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30년도 지난 세월에 머리가 하얀 중노인의 모습으로 변했어도 마음만은 변함없는 그의 바둑사랑은 이제 바둑이 동양인들만의 전유물(專有物)이 아니란 생각을 해본다.
문의 choi1581@daum.net
필자: 풍운재 최환정(미국명 Charles Choi)
미국바둑협회(AGA) 공인 7단
워싱턴바둑동호인회 회장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