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 중노인이…
‘빵 때리면 30집’.
바둑 두는 사람들치고 이 문구를 한번쯤 안 들어본 분은 없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바둑 국수(國手) 조남철 선생의 바둑책 ‘위기개론(圍祺槪論)’ 첫마디에 나오는 바둑 격언이다
결론적으로 얘기하면 후환이 걱정되는 바둑 한 점은 후수라도 시원하게 따내면 30집에 해당하는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당장은 더 나은 이득이 있더라도 우선 현재를 든든히 지킨다는 의미도 포함된다고 생각된다.
어찌 보면 유비무환(有備無患)의 뜻을 담고 있는 말이기도 하다. 바둑 한수의 가치판단 기준을 30집에 해당하는 가치로 표현한 것이지만, 요즈음 바둑 한수의 가치를 집으로 계산하여 6집반이라고 한다면 엄청난 가치를 말한 것 같다.
1970년대 후반, 어느 해 가을이라고 기억한다. 밤에 느닷없이 고영일 씨로부터 전화가 왔다. “빨리 바둑판을 가지고 닥터 리 집으로 오라”는 것이다. 부랴부랴 메릴랜드 이종수(산부인과 의사) 씨 집으로 가보니 바둑판을 놓고 웅성웅성하는 가운데 웬 중노인이 바둑을 두고 있었다.
-가만히 있다가 지나, 싸우다 지나
인사를 드리고 보니 한국 바둑계의 대부이신 조남철 국수다.
인척을 만나러 미국에 오셔 잠시 워싱턴을 방문했다가 바둑 동호인 소식을 듣고 이 박사 댁에 오신 것이란다. 아직도 이곳 워싱턴에 거주하는 조OO(택시운수업) 씨의 사촌형으로 잠시 동생 집에 들른 것이었다.
지도대국을 신청하니 다짜고짜 5점을 깔란다. “아니, 저는 프로 바둑하고도 3점 이상 깔아본 적이 없는데요.” 하니, 그냥 그렇게 두어보란다. 그래도 명색이 워싱턴 최고수인데 체면이 말이 아니다.
미국 와서 처음으로 지도대국, 선점하여 깔고 두는 바둑을 두다보니 멀쑥한 기분도 든다. 설마 5점이나 깔고 두는 바둑을 지기야 하겠나하고 시작했는데 점점 비세로 몰리더니 아무리 계산해 봐도 집이 모자란다. 어느새 5점의 선점 효과가 없어져 버린 것이다.
옆에서 관전하던 고영일 씨가 보다 못해 한마디 했다. “빨리 돌을 던져.” 항복신호를 하라는 거다. 마지못해 “졌습니다” 하니 조 국수 한 말씀 하신다.
“지킨다고 집이 다 되나. 집이 부족하다고 생각되면 싸워야지.”
가만 앉아서 지나, 싸우다가 지나, 지는 것은 마찬가지라는 얘기다. 선제공격이 최상의 방어란 말씀이기도 하다. 이래서 대한민국 바둑 국수에게 잊지 못할 한수 가르침을 받았다.
-가만히 있으면 본전이 아니다
요즈음도 가끔 중얼거린다. “가만히 있어 봤자 나이밖에 더 먹나.”
미국생활을 하면서 무슨 일이든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일단 벌리고 보는 것을 좋아한다. 하는 일도 많다보니 주위사람으로부터 “가만히 있었으면 본전이나 했을 텐데” 하는 소리를 많이 듣는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새로운 일을 시작하고 열정을 가지고 일에 매달리고 있었을 때가 오랜 미국생활 중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다.
요즈음은 2세 바둑교육에 관심을 두고 있다. 지난해 세계아마추어바둑대회가 한국의 한미바둑협회 주관으로 워싱턴에서 열렸다. 놀란 것은, 많은 미국 어린이들이 참석했다는 것과 중국계 어린 바둑선수는 많아도 한국계 어린 바둑선수는 한 명도 찾아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저 오래전부터 바둑 두던 1세대 한인들만 보일뿐이었다.
중국계 출신 선수들은 대부분이 20대 미만 아이들이었다. 그 부모들이 함께 하는 모습을 보고 많은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느꼈다.
한국 바둑이 세계에서 최강국으로 군림하고 한국이 주관하는 국제대회에서 한국계 어린 바둑선수가 한명도 보이지 않는 것은 우리 1세들의 책임일 수밖에 없다.
세계적으로 바둑 인구 1억 시대다. 바둑도 이제 어엿한 전문분야의 학문으로 자리 잡고 세계적으로 명예와 부를 보장받는 시대가 되었다. 기재가 있는 한국계 어린이들을 육성하고 가르쳐 한국의 국기인 바둑이 미국 내에서 태권도와 더불어 두뇌 스포츠로 자리 잡고 뿌리를 내렸으면 한다. 한국인의 긍지와 세계바둑 강국으로 위상을 높이는데 미국에 사는 한국계 1세대들이 2세, 3세들에게 가르치고 물려주어야할 문화유산이 아닐까 생각을 해본다.
(choi1581@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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