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울했던 70년대 말
지미 카터 대통령이 백악관 주인이던 70년대 말은 한국이나 워싱턴 한인사회나 암울한 시절이었다.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弑害)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신군부의 군사독재 정치가 시작되고, 광주사태 등 한국에서 들려오는 뉴스는 너무나 안타깝고 어두운 소식들뿐이었다
그 무렵 워싱턴 한인사회도 박동선 로비 사건에 이은 김형욱의 미 의회 청문회 사건 등으로 인해 떠들썩했던 시절이었다.
박 대통령 시해사건은 가뜩이나 어려운 생활을 하던 미국의 워싱턴 한인사회에도 찬바람을 몰고 왔다. 유학생들은 한국에서 송금받기도 힘들고 한국에서 미국으로 출국할 때에도 외화반출을 극도로 단속하여서 많은 한인들이 생활고를 겪었다.
최소한의 생활비도 없이 미국에 당도하다보니 유학생이나 가족이민으로 미국에 온 사람들은 당장 생계가 막막(寞寞)하여 일가친척들이나 가까운 연고자들에게 찾아가거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초창기 이민시절이라 미국에 조금 일찍 온 사람들 역시 별반 생활형편이 넉넉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도 한인들끼리는 모여서 부락을 이루고 서로 돕고 살았다.
당시 워싱턴 인근 한인들의 밀집지역으로는 북버지니아의 알링턴, 포트 벨보어 군 부대 근처의 알렉산드리아가 있고 메릴랜드는 오덴톤 군 부대 주변, 그리고 볼티모어 지역으로 기억된다.
-숨은 고수
메릴랜드 리버데일 지역이었을 것이다. 워싱턴 D.C.를 넘어 메릴랜드 경계지역에 켄트 가든이라는 아파트 단지가 있었다. 프린스 조지 카운티로 기억하는데 여기에 많은 한인들이 밀집하여 살았다. 한인들의 이민 숫자가 많지 않았을 때였는데도 아파트 단지 내에 많은 한인들이 모여서 부락을 이루고 살았다. 대부분의 거주자들은 흑인 영세민들이었던 곳이다. 아마도 한인들이 모여 살기에는 여러모로 편한 사정이었으리라 짐작된다.
그곳에서 처음 만난 분이 메릴랜드의 당대 최고수(最高手) 유달산 씨다. 하루는 워싱턴 D.C. 를 지나 여기저기 허름한 동네를 거쳐 어느 어둑한 아파트 지하실로 들어서니 어디서 바둑 두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여기로구나” 하고 들어서니 낡은 탁자 위에 판때기 바둑판 몇 개를 두고 모인 정다운 한인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썰렁한 주변 환경과는 너무나도 다른 화기애애한 분위기다. 잠시 후 점잖고 낯익은 듯한 목소리로 누군가 “반갑습니다.” 하고 인사를 해왔다.
어느 한국 작은 동네의 어르신 같은 모습으로 한국 부채까지 들고 나오신 분은 유달산 씨였다. 일본에서 정식으로 바둑을 배웠다는 유 씨는 바둑 이론과 바둑 고전에도 달통하여 한번 바둑 이야기를 하게 되면 끝없는 강의로 이어지는 분이었다.
대학 교수 같은 풍모를 지녔는데 바둑한판 대국을 신청하면 매우 심중한 표정의 도사님으로 돌변하였다.
-한판의 고행 수업
도사가 바둑판을 놓고 도를 닦듯이 근엄한 모습이 되어 한 수 한 수 무슨 제례(祭禮)를 지내듯이 바둑돌을 판에 놓곤 하였다. “내가 바둑 두러왔나, 아니면 도(道)를 닦으러 왔나” 할 정도로 엄숙한 분위기가 됐다.
그렇게 바둑을 두다 보면 이기고 지는 승부에는 관심도 멀어지고 한판의 고행(苦行) 수업을 한 기분이 들었다.
일본에서는 바둑을 기도(棋道)라고도 하고 무엇이든, ‘정신일도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이면 된다던데 한 수 배워서 나쁠 것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한학과 고전에도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계셔서 바둑과 더불어 밤새는 지도 모르고 시간을 같이 보냈던 기억이 새롭다.
그 이후 모 신문사에 칼럼도 쓰고 책도 만들며 후진양성에 힘을 기울인다는 소식을 들었다. 언젠가는 모처에서 잠시 만나 뵌 적이 있다. 그리고는 많은 시간이 또 흘러갔다.
이제는 유 선생도 많이 연로 하셨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유 선생님 건강하셔서 다시 한 번 바둑도, 인생살이도 한수 가르쳐 주세요.
choi1581@daum.net
필자: 풍운재 최환정(Charles Choi)
미국바둑협회(AGA) 공인 7단
워싱턴바둑동호인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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